진성여왕과 각간 위홍 삼국시대

 

 진성여왕과 위홍의 近親相姦 不倫 아니었다  

 ‘聖骨 피’ 보존 위해 근친혼 성행  

                                                                                                                                                                     글·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드라마 ‘태조 왕건’의 도입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진성여왕과 삼촌 각간 위홍의 사랑. 세간의 눈은 이를 있을 수 없는 ‘悖倫’으로 재단하면서 신라 멸망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는 유교적 윤리기준에 따른 현대의 잣대이지 당시의 잣대는 아니다. 신라 왕실은 엄격한 골품제 신분을 유지하고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을 제외한 누구와도 혼인하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결혼하지 않은 진성여왕에게 각간 위홍은 공인받은 남편이었다.  KBS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은 진성여왕과 삼촌 각간(角干) 위홍(魏弘)의 이야기를 불륜으로 그리고 있다. 둘의 불륜이 신라 멸망의 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둘의 불륜 등으로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도적이 들끓어 신라가 망했다는 시각이다. 이 드라마처럼 신라의 멸망 요인을 진성여왕의 황음(荒淫)에서 찾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견해가 아니다.  그러나 막상 진성여왕과 위홍의 불륜관계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상당히 소략하다.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과 좋아지내더니 이 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그에게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케 하였는데, 그 책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이 외에 “삼국사기”에는 제49대 헌강왕조의 ‘(헌강왕이) 즉위하자 이찬(伊) 위홍을 임명하여 상대등으로 삼고’란 구절이 전부다. 이 기록만으로는 둘이 정말 삼촌과 조카 사이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더이상의 기록이 없지만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刹柱本記)에 위홍이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의 친제(親弟)라고 나오기 때문에 진성과 둘의 사이가 불륜이라는 비판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신라 사회에서 진성여왕과 삼촌 위홍의 관계는 정말 비판받을 일이었을까.  진성여왕의 치세를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려는 배경에는 여성이 왕위에 오른 것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유교적 남성우월주의 사고가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나라가 신라였다. 신라는 제27대 선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그리고 제51대 진성여왕이 여성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신라가 남녀평등주의 사회였기 때문은 아니다. 조선조때보다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녀가 평등한 사회는 결코 아니었다.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신라사회가 남녀라는 성별 구분보다 ‘뼈다귀’(骨)로 불리는 신분 구분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신라사회의 지배층은 스스로 성스러운 뼈다귀란 뜻의 성골(聖骨)과 진짜 뼈다귀란 뜻의 진골(眞骨)로 부를 정도로 신분을 절대적 분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성골인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진골인 남성 귀족들을 제치고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성여왕이 결코 훌륭한 임금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비난이 과도하다는 이유는 그 이후로도 제56대 경순왕까지 다섯명의 임금이 더 있었고,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기까지 왕조의 수명은 38년을 더 유지했다는 점에 이르면 명백해진다.  진성여왕은 겨우 11년을 재위에 있다 세상을 떴다. 그 뒤를 이은 다섯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그만이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각간 위홍이 사망한 후의 상황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위홍이 죽은 후에는 비밀리에 미소년 2∼3명을 불러들여 관계를 갖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니 이로 인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다.’

 ‘진성은 불륜’ 비난은 현재의 잣대

 신라의 기강이 문란해진 이유가 진성여왕의 황음에 있다는 듯이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성을 천시하는 김부식의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된 사관일 뿐이다. 김부식은 잘 알려져 있듯 유교적 사관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김부식의 이런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신라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로 평가받는 제27대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선덕왕이 세가지 일을 미리 알다’라는 항목에서 선덕여왕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에 향기가 없는 것과 국경을 침입한 백제군이 어느 장소에 숨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죽을 날짜를 미리 안 현명한 임금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이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틈바구니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 다음의 ‘논하여 가로되’(論曰)라는 김부식 자신의 평은 바로 앞에 적은 사실과는 정반대의 부정적 기술 일색이어서 읽는 이를 당황하게 한다.

 “논하여 가로되 내가 들으니 옛날에 여화씨(女禍氏)가 있었으나 그가 바로 천자가 아니라 복희(伏羲)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요. 여치(呂雉)와 무조같은 경우는 어린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했으나 사서(史書)에서는 왕(王)이라 공공연히 칭하지 못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라고만 기록하였다. 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에서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書經)’에 ‘암탉이 새벽에 운다’하였고, ‘역경(易經)’에 ‘암퇘지가 뛰어다닌다’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여화씨는 중국 상고시대의 전설적 임금인 복희의 누이동생이다. 여치는 한나라 고조의 부인이고, 무조는 당나라 고조의 부인이다. 특히 무조는 측전무후라 하여 여걸로 알려져 있는데 남성들에게는 줄곧 비난의 대상이었다. 김부식의 논리에 따르면 중국은 이런 여인들이 있었어도 임금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여성이 임금이 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또 다시 여성인 진덕이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망하기는커녕 불과 10여년 후 삼국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재위한 기간은 서기 632년부터 654년까지였다. 이 시기는 실로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삼국통일의 토대를 이룬 기간이었다. 김부식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사실은 외면한 채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라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진성과 위홍이 삼촌 관계였다는, 그래서 불륜이라는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김부식은 둘이 숙질 사이였음을 몰랐을 수도 있다. 따라서 둘의 관계를 근친혼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가 발견된 이후의 일이다. 문제는 둘의 근친관계를 당시의 잣대가 아니라 현재의 잣대로 바라보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근친혼 성행한 신라 지배층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를 비난하기 전에 당시 신라 지배층의 혼인 풍습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인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관계를 통해 당시의 혼인풍습과 관념을 알아보자. 태종무열왕의 부인을 “삼국사기”는 ‘서현(舒玄) 각찬의 딸’이라고 적고 있고 “삼국유사”는 ‘왕비는 문명왕후 문희니, 즉 유신공의 막내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춘추의 부인이 김유신의 막내누이란 말이다.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제30대 문무왕과 각간(角干)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 등으로서 서라벌과 신라 사회를 주름잡았다. 이것이 서라벌 시내를 오줌으로 잠기게 했던 꿈의 징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아들들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유신의 부인인 지소부인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매제이자 장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예는 단지 김유신과 김춘추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라 통일의 기초를 열었던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아우인 갈문왕 입종이었다. 그런데 갈문왕 입종의 부인은 법흥왕의 딸이다. 즉, 법흥왕의 딸은 숙부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진흥왕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흥왕에게 그 모친은 사촌누님이 되는 셈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제31대 신문왕(681∼692)의 부인은 당초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장인 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쫓아내고 새 왕비를 맞아들였으니 김흠운(金欽運)의 딸이었다. 김흠운은 바로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이 역시 족내혼의 한 모습이다.  이런 예는 또 있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갈문왕 입종의 딸이었다. 갈문왕 입종은 진흥왕의 아버지였으므로 동륜은 고모와 혼인한 셈이다. 또 진평왕의 부인 마야부인 김씨는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었다. 갈문왕은 보통 임금의 동생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니 진평왕은 첩첩으로 족내혼을 이룬 셈이다.

 특권 독점하려는 정략결혼의 산물

 우리 시각으로는 ‘견(犬)족보’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 법하지만 신라 귀족층들, 특히 김씨들이 이런 족내혼을 맺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배타적 특권을 독점하려는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던 것이나 신라 왕실에 족내혼이 많은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권력에 대한 특권 때문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 문희와 관계하고도 처음에는 혼인할 의사가 없어 외면했다. 그 이유는 김유신의 집안이 성골이 아닌 것은 물론 서라벌 출신의 정통 진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멸망한 금관가야계 왕족 출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이었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天明)부인이었다. 조부와 외조부가 모두 임금인 것이다. 이 경우 김춘추는 성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이 부인을 취하는 과정은 김유신이 누이를 김춘추와 결합시키는 과정과 크게 다름이 없다는 점이다.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이 집안 내력이었던 모양이다.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을 보자.

‘처음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기뻐하여 눈짓으로 꾀어 중매도 없이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충북 진천) 대수(大守)가 되어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 딴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켰는데 갑자기 벼락이 그 집 문간을 때려….’

 금관가야 출신의 방계 진골 김서현은 진흥왕의 형제인 숙흘종의 딸을 취함으로써 신분을 상승시키려 한 것이다. 둘 사이에서 낳은 김유신과 그 동생 문희는 어머니가 진흥왕과 사촌 사이였으므로 서라벌 출신의 정통 진골세력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 것이지만 아직도 성골이나 정통 진골과는 차이가 있었다. 김유신은 이런 신분상의 불리함을 메우기 위해 누이를 김춘추와 결합시킨 것이었다. 전형적인 정략결혼이다.  이 정략결혼은 결과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삼국사기”는 ‘나라 사람들이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에 이르기까지 28대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끝의 임금까지를 진골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골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 즉 박(朴)·석(昔)·김(金)임을 뜻하고 진골은 부계나 모계 중 어느 한쪽이 왕족이라고 이해해 왔다. 그런데 이 경우 김춘추는 부모 모두 왕족이어서 성골이어야 하는데 진골로 분류하는 이유는 그의 부인이 성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성골은 선천적 요인뿐만 아니라 후천적 요인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로서는 문희를 취하는 것이 자칫하면 왕위를 빼앗기는 결과가 될 수 있었으나 문희의 오빠가 김유신인 것이 낮은 신분의 여자와 결혼한 불리함을 극복해 주었다. 김유신은 “화랑세기”에 따르면 제15세 풍월주였을 뿐만 아니라 선덕·진덕여왕 시절 뛰어난 군사적 자질로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무렵에는 막강한 군사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관계를 맺은 때가 선덕여왕 때인 것처럼 적었지만 실제로는 선덕이 공주 시절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처남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없어진 것이 김유신과 김춘추에게는 기회였다. 김춘추는 비록 성골의 지위는 잃었을지 모르지만 정통 진골로서의 명분은 확실히 갖고 있었다. 진덕여왕이 사망할 무렵 김춘추는 최소한 정통 진골의 명분을 갖고 있었고, 김유신은 이 명분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당초 군신(群臣)들이 섭정을 청한 인물은 이찬(伊) 알천(閼川)이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알천이 이렇게 사양했다고 적고 있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할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실로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김춘추는 여러번 사양하다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는 조금 다른 상황을 전하고 있다.

‘진덕왕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었다. 김유신이 재상인 알천(閼川) 이찬(伊)과 의논하고 이찬 춘추를 맞아 즉위케 하니 이가 태종대왕이었다.’

 당초 알천을 추대하려던 군신의 의지를 좌절시킨 이는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춘추는 군사권을 장악한 처남 김유신의 추대로 임금이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김유신의 시나리오였고 그 결과는 정략결혼의 완성이었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대부분 권력의 향배와 긴밀하게 맞물려 진행되었다. 34대 효성왕(재위 737∼742)의 혼인관계를 보면 이것이 분명해진다. 효성왕이 즉위했을 때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왕비는 박씨였다. 김춘추 이후 대부분의 왕비는 김씨였는데 이때 박씨 왕비가 등장하자 많은 정치적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효성왕은 이런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재위 3년 이찬 김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음으로써 김씨 왕비가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효성왕의 장인 김순원은 효성왕의 아버지 성덕왕의 장인이기도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혼인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 한 것이다. 이는 신라의 근친혼을 단순히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봐서는 안되는 사안임을 보여준다. 근친혼은 왕권과 권력의 문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족내혼 풍습 고려 왕실까지 이어져

 신라 귀족 중에서도 이런 근친혼을 비판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랑세기” 20세 풍월주 ‘예원공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원공은 우리나라의 혼도(婚道)를 부끄럽게 여겨…고치려 했으나 관습이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우니 항상 걱정하였다. 자손들에게 다시는 나쁜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공의 아들 오기공이 사촌누이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공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이런 근친혼이 비단 신라사회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 대로라면 진성의 황음에 따라 권력을 차지한(?) 고려 태조 왕건도 족내혼의 전형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왕건은 결혼정책에 따라 무려 6명의 왕비와 23명의 부인을 두었다. 6명의 후비는 대부분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들이었다. 왕건은 이들과 결혼함으로써 지방의 유력호족과 결합을 굳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섯번째 왕후인 신성(神成)왕후 김씨는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金億廉)의 딸이었다. 송악이라는 변방 호족 출신인 왕건에게는 권위가 부족했는데 신라 왕실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김씨를 취한 것이다. 왕건은 또 자신의 두 딸을 경순왕에게 출가시켰다. 한 남자에게 두 딸을 준 것 자체가 족내혼의 전형이기도 한데 이로써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고 왕건은 경순왕의 조카 사위가 된 것이다.  태조 왕건의 장남으로 고려의 제2대 왕위에 오른 혜종도 족내혼을 치렀다. 그의 장인은 경기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왕규(王規)였는데, 왕규는 태조 왕건에게도 제15, 16비(妃)를 들인 바 있었다. 왕규는 왕건의 장인이자 사돈이기도 했다. 왕규는 사위 혜종을 몰아내고 왕건의 제16비에게서 난 아들, 즉 외손자를 즉위시키려 하다가 제거된다. 이처럼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 왕실에서도 족내혼은 널리 행해졌던 풍습의 하나다. “삼국사기” 내물왕조에서 김부식은 신라의 족내혼을 이렇게 비평한다.

‘처(妻)를 취할 때 동성(同姓)을 얻지 않는 것은 남녀가 다름을 두터이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공(魯公)이 성이 같은 오(吳)에 장가들고, 진후(晉侯)가 성이 같은 네 첩을 가지자 진(陳)의 사패(司敗)와 정(鄭)의 자산(子産)이 크게 나무랐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동성과 혼인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소생과 고종·이종사촌 누이들까지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나무란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다. 흉노가 어미 자식간에 붙는 것은 이보다 더 심한 일이다.’

 김부식의 시각은 ‘비록 외국의 풍속이 서로 다르다 할 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나무란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데 집약되어 있다. ‘우리의 예속’이 아니라 ‘중국의 예속’으로 비판한다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앞서 신라의 혼인 풍습을 부끄러워한 20세 풍월주 예원은 당나라에 갔다 온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라의 근친혼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근친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

 조선의 유학자들은 더 크게 진성여왕을 비판했는데 이들의 초점 역시 진성이 여자라는 데 맞춰져 있었다. 당초 후사가 없었던 정강왕은 시중 준흥(俊興)에게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진덕왕의 옛일을 본받아 (진성을)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는데 조선의 권근(權近)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이를 이렇게 비판한다.

‘정강왕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선덕·진덕왕의 고사를 핑계삼아 만(曼·진성)을 세워 군왕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신하 준흥은 배운 것이 없고 꾀가 없으므로 전대(前代)에 두 임금(선덕·진덕)이 왕위에 있으면서 이치를 배반하고 윤리를 어지럽혀 법으로 취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 허물을 본받고 힘써 난명(亂命)을 쫓아 음란하고 더러운 행동을 자행케 하니 군도(群盜)가 아울러 일어나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임금은 있으되 임금이 아닌 것(君不君)이고, 신하는 있으되 신하가 없는 것(臣不臣)이다. 아, 애석하다.’

 그러나 전통적, 토속적 자리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삼국유사” 왕력 진성여왕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진성여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만헌(曼憲)이니 정강왕의 동복누이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 추봉(追封)한 혜성대왕이다.’

 일연이 보기에 위홍은 진성여왕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은 또 선덕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고 적고 있다. 남성 성골이 없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여왕들은 정식으로 국혼을 치르지는 않았어도 공인받은 남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신라 골품제 사회의 한 특징이지 ‘음란’이나 ‘간통’이라는 말로 비하할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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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진성여왕을 다시 보라

황 원 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이름이 김만(金曼). 신라 제51대 임금이며 세 번째요 마지막 여왕이다.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은 작은 오라비 정강왕 김황(金晃)의 뒤를 이어 897년 6월에 조카 효공왕 김요(金嶢)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9년 11개월간 신라를 다스렸다.

진성여왕은 제48대 임금 경문왕의 딸이다. 그녀의 위로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큰 오라비 김정(金晸)이 제49대 임금 헌강왕이다. 헌강왕이 죽을 때 그의 유일한 혈육인 요가 너무나 어렸으므로 아우 황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정강왕이 불과 1년 만에 죽으면서 누이동생 만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신라는 무슨 까닭에 진덕여왕 사후 233년 만에 다시 여왕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더구나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의 형편은 국운이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진성여왕은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처럼 혈통의 신성성과 왕통의 정당성이 보장된 성골(聖骨)도 아니었다. 그때는 백년 넘게 이어져온 진골들의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난국에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은 ‘숙부인 김위홍(金魏弘)과 간통하고, 위홍이 죽자 미소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악평을 듣기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도둑들이 설치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데 임금 자리에 앉아서 쾌락만 추구하다가 나라를 망쳤다는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는 과연 틀림이 없는 것인가.

진성여왕의 즉위는 선왕인 정강왕의 유조(遺詔)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정강왕 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 여름 5월. 왕이 병이 위중하매 시중 준흥(俊興)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독해지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 불행히도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법(骨法)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옛일을 본받아서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자식이 없어서 누이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인데, 정강왕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누이동생이 천성이 총명하니 임금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골법, 즉 체격이 사내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셋째는 옛날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도 여자로서 임금 노릇을 한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와 셋째 이유는 그렇다고 쳐도 둘째 이유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뼈대가 사내처럼 굵직굵직하게 생겼다는 것이 왕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는 진성여왕 즉위에 제동을 걸고 나섰던 세력이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리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를 들먹인 것도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즉위 때의 사정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헌안왕 5년(861년) 정월에 왕이 위독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불행히도 아들이 없어 딸만 둘을 두었노라. 우리나라 옛일로 선덕왕과 진덕왕 두 여왕이 있었으니 이는 가히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따를 수는 없도다. 내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성한 덕을 갖추었으니 그대들이 임금으로 모시고 섬긴다면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것이니라.”

이처럼 경문왕은 장인인 헌안왕이 ‘여왕이 임금노릇을 하는 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위의 자격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문왕의 아들 정강왕은 이와 반대로 누이동생이 비록 여자이지만 총명하고, 또한 체격이 사내 같으니 왕위를 물려준다고 했다.

김부식(金富軾)은 사대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지독한 여성 혐오자였다. 진성여왕의 왕위 계승이 매우 못마땅했던지 노골적으로 악평을 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2년 조의 기록을 보자.

- 왕이 그 전부터 각간 위홍과 더불어 간통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위홍으로 하여금) 언제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토록 하여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고 했다.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했다. 그 뒤로부터 미소년 두세 명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정사를 맡기니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제 마음대로 방자하게 날뛰고, 재물로 뇌물을 먹이는 짓을 공공연히 했으니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풍기와 규율이 문란해졌다. -

김부식은 이에 앞서 선덕여왕 조에서도 여왕의 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쏟아냈다.

- …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안방으로부터 튀어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운다’하였고, <주역>에는 이르기를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

김부식의 이 글은 헌안왕이 죽기 전에 사위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한 말과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까. 헌안왕이 말하기를,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이 있었던 것은 가위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선덕여왕의 악평을 고려하면 헌안왕이 했다는 이 말도 사실은 김부식이 헌안왕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유학자 김부식은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 못지않게 여성을 천대하고 비하했다. 게다가 신라 상류사회의 개방적인 성 풍조가 너무나 못마땅했기에, 또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근친혼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를 음란으로 단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부식도 신라 왕실의 모든 근친혼 사실을 말살할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소태후(只召太后)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공주로 숙부인 김입종(金立宗)에게 시집가서 진흥태왕을 낳았다.

이런 김부식이 자식 교육은 잘못하여 자기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인종 때 내시 노릇을 하면서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워 매를 맞지를 않나,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감악산으로 도망쳤다가 무신들에게 잡혀 죽어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여자냐 남자냐가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다.

신라 당대의 성 관념에 따르면 숙질간, 사촌간, 심지어는 이복 남매간의 혼인과 연애는 보통이었다. 근친혼을 두고 불륜이니 뭐니 하고 떠들지도 않았다. 불륜이란 말도 없었다. 사실 고려시대 초기만 해도 황실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숙질이나 이복 남매간의 근친혼을 오히려 장려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화랑세기>에서 말한 이른바 ‘신국(神國)의 도(道)’였다. 진성여왕 당시 신라 사회의 성 도덕이 근친혼을 혐오하는 분위기였다면 진성여왕이 ‘남편’으로 섬긴 숙부 위홍에게 혜성대왕이란 시호를 추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위홍은 단순히 조카 진성여왕과 불륜관계에 있던 숙부가 아니라 진성여왕의 남편이었다. <삼국유사>는 위홍이 부호부인의 남편이라고 하면서도, ‘진성여왕의 배필은 위홍각간, 추봉한 혜성대왕’이라고 분명히 썼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떳떳한 부부관계였다. 부호부인은 진성여왕의 유모라고 했으니 신분이 당연히 진성여왕보다 아래였고, 또 정부인의 자리도 여왕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진성여왕에게는 아들도 있었다. 그것도 둘 이상이었다. <삼국유사>에 진성여왕이 ‘막내아들 양패(良貝)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패가 위홍의 아들인지 다른 남편의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진성여왕이 정말로 음탕하여 대신들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면 10년 동안이나 왕좌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에 진지왕이 정사는 제쳐두고 여색만 밝힌다는 구실로 폐위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오해에 따른 진성여왕의 악의적 평가는 재고되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바로 보는 길이다.

<경제풍월>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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