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깨진 기와 조각이 살려낸 역사의 진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 

 

  지난해 5월 경주 포석정 인근 유적 조사중 폐기와 더미에서 ‘砲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몇 조각의 기와 파편들이 발견됐다. 이들 기와 파편은 놀랍게도 그동안 위작으로 알려졌던 “화랑세기”의 진실성 여부와 포석정에 얽힌 진실을 담고 있었다. 우리를 1,500년전 신라시대로 이끌어가는 몇조각의 기와 파편들을 따라 역사의 진실로의 여행을 시작해 본다.

  (경애왕 4년)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쳤으므로 왕은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날랜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했다. 견훤은 구원병이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별안간 왕경으로 들어왔다. 왕은 비빈·종척·외척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하며 놀다가 적병이 닥치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왕과 비첩 몇 사람이 후궁에 있었는데 군영에 잡아다 왕을 강제로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했다. 그리고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비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왕의 족제를 세워 나라 일을 맡기니 이가 경순왕이다.
  흔히 우리가 왕들의 놀이터로 알고 있는 경주 포석정(鮑石亭)에 대한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이다. 여기서 왕은 신라 제 55대 경애왕(924~927)이고 태조는 고려의 창업주, 즉 왕건을 일컫는다.
  기록을 다시 쉽게 풀어 보면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후백제의 견훤에게 잡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 몇줄의 기록 때문에 우리의 인식 속에 포석정은 신라 왕들의 놀이터였으며 비운의 경애왕이 신라의 운명을 재촉한 놀이를 하였던 곳으로 각인돼 있다. 현재 포석정 앞에 있는 안내 표지판에도 역시 위의 기록을 인용해 적어 놓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에 대한 원초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루어진 역사 연구의 성과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믿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과거에 있었던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특히 고대사의 경우 다른 어느 시대보다 많은 관심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와는 다른 사실들이 진리인양 주장되고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예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들이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사건 전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재했던 역사의 극히 한정된 부분만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다 보면 엉뚱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 연구에 훈련받은 연구자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훈련받은 연구자라도 역사적 진실을 밝혀낸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서 역사가들이 겸허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깨진 기와 조각에 쓰여있는 砲石이라는 글자의 의미

  포석정은 이처럼 한정된 자료를 통한 역사 연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포석정은 결코 왕들이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던 유희의 장소가 아니다. 포석정은 오히려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스럽고도 경건한 사당이었음이 새롭게 나타난 사료들로 인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포석정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긴다. 경주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포석정을 찾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포석정은 신라 말기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기록에 나오고 있다. 따라서 포석정이 그 이전에 있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포석정이 유희의 장소가 아니라 사당이었으며 그 역사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말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증명해 보기로 한다.
  우선 앞서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이 겨울 11월에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음력 11월은 한겨울이다. 과연 한겨울에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 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한겨울이라고 해서 잔치를 열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반박할 수 있다. 당연히 단순한 추측으로 역사적 기록을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하며 놀기 두달 전 후백제의 견훤은 경주에 이웃한 영천의 고울부까지 쳐들어와 있었다. 다급해진 경애왕은 부랴부랴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이같이 급박한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국왕이 지배세력들과 잔치나 베풀고 놀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서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것은 잔치를 하며 놀러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국가적 위기에 처한 신라의 왕과 그를 둘러싼 일족 그리고 최고의 지배세력들은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당시 신라의 국왕을 비롯한 지배세력이 왜 포석정에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록대로 잔치를 하며 놀았다는 생각 정도를 넘어서기 어려웠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89년과 95년 두 차례에 걸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화랑세기”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책이다. 그동안 역사가들이 만들어온 신라의 역사 나아가 한국 고대의 역사가 과거에 있었던 실재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확인하게 되어 부끄럽고, 신라 사람 김대문이 직접 신라의 사실들을 현장중계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가슴이 뛰는 것이다. 물론 “화랑세기” 역시 서기 540년에서 681년까지 있었던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역사가들로 하여금 그동안 만들어온 역사가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 반성하게 만든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신라의 모습을 보며 지난 세기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이 만들어온 역사상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고대사학계는 오히려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그동안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이 만들어온 역사상과는 전혀 다른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화랑세기”를 허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자세히 보면 그 자체에서 위작일 수 없다는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 “화랑세기”의 이야기들이 신라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사실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여기서 말하려는 포석사의 존재다.
  “화랑세기”에는 포석사 또는 줄여서 ‘포사’(鮑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 또는 포사의 ‘사’는 사당 ‘사’(祠)자다. 사당은 신주를 모셔둔 집이다. “화랑세기” 8세 문노(538∼606) 조에는 이와 관련한 중요한 기록이 나온다.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畵像)을 모셨다. (김)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문노)공을 사기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각간으로 추증하였고 신궁의 선단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이 기록을 통해 포석사에는 문노의 화상을 모셨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8세 풍월주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를 좋아하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고 하며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화랑도를 호국선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문노는 풍월주가 되기 전에 이미 나라를 지키는 전쟁에 여러번 참전했다. 554년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이 백제를 칠 때는 열일곱살의 나이로 이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555년에는 현재의 서울 근처인 북한(北漢)에서 고구려군을 쳤다. 557년에는 북원에서 북가야를 쳐 모두 공을 세운 바 있다. 그 결과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문노)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신라 사람들은 문노가 삼한통합(삼국통일) 훨씬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노에서 비롯하였다는 사풍을 높이 평가했으며 통일의 대업이 그로부터 싹텄다고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한통합 후 문노의 화상을 포석사에 모신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만큼 포석사는 신성한 사당이었다. 더욱이 삼한을 통합한 사기의 근본이 되는 문노를 모신 포석사가 결코 놀이터일 수는 없다.
  그러면 문노의 화상을 모셨던 포석사와 경애왕이 잔치를 벌였다는 포석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경애왕이 927년 11월에 갔던 포석정이 포석사였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이웃한 영천까지 견훤이 쳐들어와 있던 당시 삼한을 통합한 사기의 근본이라고 받들던 문노의 화상을 모신 포석사는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약 1년6개월 전인 1999년 5월7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주목할 만한 발굴을 했다. 포석정(鮑石亭) 남쪽 담장 밖 유적을 조사하다 폐기와 무지에서 ‘포석’(砲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발굴한 것이다.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명문이 있는 기와의 제작연대는 삼국시대로 소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폐기와 무지에서 함께 출토된 기와는 대부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포석정은 9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이번 발굴로 그 시기가 훨씬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포석사는 나라의 영웅을 제사지내던 사당

  깨진 평기와는 가로 5.5㎝, 세로 8㎝의 네모난 구획으로 나누고 그 안에 포(砲)자는 4.3㎝x4.0㎝, 석(石)자는 2.4㎝x3.0㎝의 크기로 쓰여져 있다. 포석(砲石)은 포석정(鮑石亭)의 포석(鮑石)을 발음대로 쓴 것이다. 영묘사(靈妙寺)를 영묘사(令妙寺)로 쓴 신라시대의 기와가 출토된 예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어려운 한자를 쉬운 한자로 바꾸어 기와의 명문을 새겼던 것이다.
  ‘포석’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기와는 1,300∼1,500년 전의 신라시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길잡이가 되어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삼국시대 신라때 이미 ‘포석’이라는 명문을 새긴 기와를 덮었던 건물이 포석정에 인접한 곳에 축조돼 있었던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포석 명문을 새긴 기와는 무엇을 하던 어떤 건물을 덮었던 것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이 기와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의 지붕을 덮었던 기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와 “화랑세기”의 기록을 통해 포석사의 존재를 되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포석명 기와는 포석사의 존재만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일부에서 위작이라고 몰아붙였던 “화랑세기”가 위작이 아니라 신라 사람 김대문이 저술한 책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해 준다.
  신라 멸망 이후 잊혀졌던 포석사를 1,000년이 넘은 지금 되찾은 것이다. 신라가 망한 후 고려시대인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 포석사의 존재를 무시하고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놀았다는 기록을 한 것은 이미 고려시대에 신라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멸망한 나라의 역사는 고려인의 수중에서 다시 한번 슬픔을 겪게 된 것이다.
  포석명 기와의 출토로 포석사가 삼국시대 신라의 사당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됐다. 그러면 신라시대에 포석사는 무엇을 하던 사당이었을까. “화랑세기”에는 이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있다. 포석사에서 길례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고대에 행하던 5례에는 길례·흉례·빈례·군례·가례 등 5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길례는 제사의 예를 가리킨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길례의 예 몇가지를 들어보자.
  우선 김춘추와 문희가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12세 풍월주인 보리공과 동륜태자의 부인 만호태후의 딸 만룡 역시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또 문노와 그의 부인 윤궁이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김춘추와 문희의 길례를 보자. 김유신은 춘추를 집으로 불러 축국을 하다 옷고름을 찢어 문희에게 꿰매도록 했다. 그때 춘추와 문희가 관계를 가져 문희가 임신했다. 그런데 춘추는 이미 보량궁주라는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 따라서 춘추는 보량을 몹시 사랑해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했다. 이에 유신은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며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춘추는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 있었는데 선덕이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사실대로 고했다. 춘추의 얼굴색이 변했다. 공주는 춘추에게 네가 벌인 일이니 가서 구하라 했다. 이에 춘추가 문희를 구하고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길례를 행할 때 춘추와 문희는 이미 관계를 가진 뒤였다. 그러나 춘추에게는 정처가 있어 문희를 정처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그러므로 이때 춘추와 문희가 행한 길례는 혼례가 아니었다. 단지 춘추와 문희의 관계를 밝히는 제사를 포석사에서 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문노와 윤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노와 윤궁이 혼인해 살고 있었는데 문노는 골품이 낮아 윤궁의 지아비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문노가 진지왕을 폐위하는 데 참여해 17관위 중 여섯번째인 아찬의 관위를 얻고 골품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윤궁은 몹시 기뻐하며 문노에게 지아비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과연 미실이 진평왕에게 청해 왕명으로 문노에게 윤궁을 정처로 삼게 했다. 이때 진평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에 나가 길례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문노와 윤궁도 이미 혼인한 상태에서 포석사에 나가 길례를 하였다. 이는 포석사에서 그들의 관계를 확인하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석사에는 문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화상을 모셨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길례를 행했다. 포석사에서 무엇을 했는지 더 이상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포석사가 언제 만들어졌으며 무엇을 위한 곳이었을까를 생각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를 역사의 기록으로 살려낸 기와 조각

  포석사의 사는 사당 또는 묘(廟)를 가리킨다. 여기서 신라 남해왕 3년에 세웠다는 시조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조묘는 혁거세를 모신 사당이다. 시조묘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혁거세의 능이라고 알려진 5릉과 혁거세가 처음 등장했다는 나정은 남산 서북록에 위치한다. 특히 혁거세가 처음 도읍했던 금성이 위치했다는 창림사에서 포석정까지는 300여m밖에 안된다.
  때문에 신라시대때 포석사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현재의 포석정이 시조묘와 관련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포석정은 금성의 한 곳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포석정은 신라에서는 포석정이라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라는 사당이었으며, 그것은 원래 금성 안에 있던 시조묘였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시조묘를 포석사라고 불렀을까.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신궁이 만들어지면서 시조묘가 포석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닐까. 신궁은 소지왕 9년(487) 나을에 설치했는데,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제사 조에는 지증왕이 시조가 탄생한 땅 나을에 신궁을 세워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궁과 관련지어 거론되는 시조는 혁거세가 아니라 김씨의 시조를 가리킨다. 따라서 21대 소지왕 또는 22대 지증왕 때에 김씨 시조를 모신 신궁을 만들면서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의 격을 떨어뜨렸거나 그 과정에서 시조묘를 포석사라고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후 포석사와 신궁은 그 기능이 분화되었으며 동시에 일정한 연관성이 있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문노의 화상을 포석사에 모신 후 신궁의 선단에서 대제를 행했다. 그런가 하면 “화랑세기” 12세 보리공 조의 기록에서는 동륜태자의 부인이었던 만호태후가 그의 딸 만룡을 위해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행하고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포석사와 신궁에는 화상 또는 신상이 있었고, 각기 서로 다른 예를 행한 바 있다. 포석사에는 문노의 화상과 같은 화상을 모셔 놓았고, 길례를 행했다. 신궁에는 왕들의 신상이 있었다. “화랑세기” 12세 보리공 조에는 신궁에 법흥왕과 그의 첩인 옥진의 교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궁에는 김씨왕과 그의 처첩들의 신상을 만들어 모셨던 것이 분명하다.
  신궁에는 또 선단(仙壇)이 있어 문노를 위한 대제를 행한 것으로 기록에는 나타나 있다. 선단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그 이름으로 보건대 풍월주들을 모신 단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궁에서는 공주를 삼고, 왕의 가자(假子)를 삼고, 전군을 삼는 의례 등을 행했다. 이는 김씨 왕과 관련된 세력들을 의례를 행해 공주·가자·전군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나 신궁 관련 기록을 보면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영웅을 만들고 신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문노의 화상을 포석사에 모신 일이나 법흥왕과 그의 첩 옥진의 교신상을 신궁에 모신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나 “화랑세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이러한 사실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렇듯 “화랑세기”에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화랑세기”가 이야기하는 신라를 이해할 준비가 안된 사람들에게 “화랑세기”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삼국시대의 포석(砲石)명 기와는 “화랑세기”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던 포석사가 실재했음을 잘 보여준다. “화랑세기”의 위작자가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포석명 기와까지 위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포석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깨진 기와 한 조각이 위작으로 몰리던 “화랑세기”를 김대문의 저작으로 되살려냈다. 깨진 기와 한 조각이 “화랑세기”의 신라인 이야기를 역사적 진실로 살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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