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원곡 (圆圆曲) - 명청 교대기, 오위업(吳偉業) (1609~1671)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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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 오삼계의 애첩이 된

명기(名妓) 원원(圓圓)의 노래

  

      원원곡   

   圓圓曲

   - 명청 교대기, 오위업(吳偉業) (1609~1671) -

 원문이 간자체로 되어있음.

 (원문과 풀이)

1.

정호당일 기인간,     鼎湖当日 弃人间,

파적수경 하옥관。     破敌收京 下玉关。

 

명나라 마지막 임금께서/ 이 세상을 떠나던 그 날

반란의 무리를 치고 서울을 되찾고자/ 오삼계는 옥관을 떠났다.


통곡육군 구호소,     恸哭六军 俱缟素,

충관일노 위홍안。     冲冠一怒 为红颜。

 

통곡하는 군사들/ 모두 상복(喪服)을 입었는데

오장군의 끓어오른 분노는/ 기실은 한 미인 때문이었다.


2.

홍안류락 비오련,     红颜流落 非吾恋,

역적천망 자황연。     逆贼天亡 自荒宴。

  

미인의 눈물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역적 이자성은 천벌을 받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전소황건 정흑산,     电扫黄巾 定黑山,

곡파군친 재상견。     哭罢君亲 再相见。

  

오장군은 번개처럼 황건적을 쓸고/ 흑산적도 모두 없앴다.

그리고 임금과 아버님 영전에 곡하고/ 미인과 재회하였지.

3.

상견초경 전두가,     相见初经 田窦家,

후문가무 출여화。     侯门歌舞 出如花。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황후 아버지의 집이었지.

귀족의 저택에선 노래와 춤이/ 꽃처럼 피었었지.


허장척리 공후기,     许将戚里 空侯伎,

등취장군 유벽거。    等取将军 油壁车。

 

황후부친 그 집에서/ 공후를 키던 미인의 몸에

오장군이 보낸/ 수레 타는 기회가 주어졌네.


4.

가본고소 완화리,     家本姑苏 浣花里,

원원소자 교라기。     圆圆小字 娇罗绮。

 

그녀의 고향은 본래 고소성/ 완화리.

원원이는 어려서부터/ 비단 옷이 어울렸지.

 

 

몽향부차 원리유,     梦向夫差 苑里游,

궁아옹입 군왕기。    宫娥拥入 君王起。

 

오나라 부차 임금과/ 동산에서 놀던 꿈.

궁녀가 부축해 가면/ 임금님도 일어났지.


5.

전신합시 채련인,     前身合是 采莲人,

문전일편 횡당수。     门前一片 横塘水。

 

전생(前生)은 틀림없이/ 연밥 따던 서시(西施)였으리라.

문 앞엔 한 줄기/ 횡당 横塘 의 물.

  

횡당쌍장 거여비,     横塘双桨 去如飞,

하처호가 강재귀?     何处豪家 强载归?

 

횡당에서 노 한쌍/ 나는 듯이 저었으니

어느 권력 센 집안의 사람이/ 억지로 태워갔나?

 

  

 

차제기지 비박명,     此际岂知 非薄命,

차시지유 루첨의。     此时只有 泪沾衣。

  

이 때에 어찌/ 박명치 않을 줄 알았으리.

이 땐 다만 눈물만이/ 옷자락을 적셨지.

 

6.

훈천의기 련궁액,     熏天意气 连宫掖,

명모호치 무인석。     明眸皓齿 无人惜。

 

하늘 채울 기세로/ 궁전까지 들어갔지만

이 아릿따운 여인을/ 반겨주지 않았네.

  

  

탈귀영항 폐량가,     夺归永巷 闭良家,

교취신성 경좌객。     教就新声 倾座客。

 

후궁에서 빼어내어/ 좋은 집에 숨겨두고

노래를 새로 가르치니/ 손님들은 탄복했지.

 

7.

좌객비상 홍일모,     座客飞觞 红日暮,

일곡애현 향수소?     一曲哀弦 向谁诉?

 

손님들 잔 돌리는 사이에/ 붉은 해는 저무니

한곡조의 애달픈 가락,/ 누굴 향해 호소하나?

 

8.

백석통후 최소년,     白皙通侯 最少年,

간취화지 루회고。     拣取花枝 屡回顾。

 

허여멓게 잘 생긴/ 장군집안/ 가장 젊었던 오장군

이 꽃가지 꺾으려고/ 고개 자주 돌렸지.

  

  

조휴교조 출번롱,     早携娇鸟 出樊笼,

대득은하 기시도?     待得银河 几时渡?

 

하루라도 빨리 팔팔한 새를/ 새장에서 꺼내라.

은하수에서 기다린다면/ 어느 때야 건너리?

  

 

한살군서 저사최,     恨杀军书 抵死催,

고류후약 장인오。     苦留后约 将人误。

 

원통하다 출전명령/ 죽어라 재촉하니

할 수 없이 남기고 떠난 약속이/ 사람을 그르쳤네.

 

9.

상약은심 상견난,     相约恩深 相见难,

일조의적 만장안。     一朝蚁贼 满长安。

 

약속한 정은 깊고/ 만나기는 어려운데

그러던 중 하루아침에 역적무리가/ 장안을 메웠다.

 

가련사부 루두류,     可怜思妇 楼头柳,

인작천변 분서간。    认作天边 粉絮看。

 

가련쿠나, 시름겨운 여인은/ 누각 버들 앞에서

하늘가에 흩날리는/ 버들개지 같아라.

  

  

편색록주 위내제,     遍索绿珠 围内第,

강호강수 출조란。     强呼绛树 出雕栏。

 

두루 녹주 绿珠 를 찾듯/ 안채를 에워쌌고

억지로 강수 绛树 를 불어내듯/ 난간에서 끌어냈네.

  

  

약비장사 전사승,     若非壮士 全师胜,

쟁득아미 필마환?   争得娥眉 匹马还?

 

만약 장군이/ 온전히 승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가인(佳人)을/ 말 태워 올 수 있었으리?

 

10.

아미마상 전호진,     蛾眉马上 传呼进,

운환불정 량혼정。     云鬟不整 惊魂定。

 

마침내 말 타고/ 소리 따라 들어오니

머리카락 흘렀지만/ 마음은 진정되고.

  

사거영래 재전장,     蜡炬迎来 在战场,

제장만면 잔홍인。   啼妆满面 残红印。

 

촛불 켜고 맞이한 곳은/ 전쟁터였으니

눈물로 화장 지워져/ 얼룩진 얼굴.

  

 

 

전정소고 향진천,     专征箫鼓 向秦川,

금우도상 거천승。     金牛道上 车千乘。

 

피리불고 북치며/ 진천 秦川 으로 들어가니

금우도 金牛道 위에는/ 병거가 천대나 되었지.

  

  

야곡운심 기화루,     斜谷云深 起画楼,

산관월락 개장경。   散关月落 开妆镜。

 

야곡관 斜谷關 구름 깊은 곳에/ 신방을 꾸몄고

대산관 大散关달 기우는 곳에/ 화장대 열었다.

11.

전래소식 만강향,     传来消息 满江乡,

오구홍경 십도상。     乌桕红经 十度霜。

 

전해지는 소식은/ 강마을에 널리 퍼져

오구목 붉은 단풍/ 서리 맞기 열 번.

  

 

교곡기사 련상재,     教曲伎师 怜尚在,

완사녀반 억동항。    浣纱女伴 忆同行。

 

그 옛날 노래 선생도/ 무사함을 기뻐하고

빨래터 친구 아낙들도/ 옛 동료를 추억했지.

 

구소공시 함니연,     旧巢共是 衔泥燕,

비상지두 변봉황。     飞上枝头 变凤凰。

  

그 예전에 같은 둥지에서/ 진흙 머금던 제비가

이제는 가지 높이 높이 올라/ 봉황새가 되었구나.

  

  

 장향존전 비로대,     长向尊前 悲老大,

유인부서 천후왕。   有人夫婿 擅侯王。

 

우린 술잔을 앞에 놓고/ 늙어감을 슬퍼하는데

어떤 이는 낭군이 제후가 되어/ 거드럭거리네.

  

12.

당시지수 성명루,     当时只受 声名累,

귀척명호 경연치。     贵戚名豪 竞延致。

 

그때는 그런 명성도/ 그러려니 하였지.

귀인, 외척, 명사, 호족/ 다투어 초청했지.

 

일곡주련 만곡수,     一斛珠连 万斛愁,

관산표박 요지세。    关山漂泊 腰肢细。

 

일곡명주 노래는 하나지만/ 시름은 만 갈래

국경의 산을 떠도느라/ 허리만 여위어갔다.

  

착원광풍 양락화,     错怨狂风 飏落花,

무변춘색 래천지。    无边春色 来天地。

 

사나운 바람에/ 꽃이 진다고 원망했더니

가없는 봄빛이/ 온 세상에 찾아왔네.

 

13.

상문경국 여경성,     尝闻倾国 与倾城,

번사주랑 수중명。     翻使周郎 受重名。

 

일찍이 듣자하니/ 절세미인 덕택에

오히려 오나라의 주유랑도/ 명망을 더 얻었다 하네.

  

처자기응 관대계?     妻子岂应 关大计?

영웅무내 시다정。   英雄无奈 是多情。

 

여자가 어찌/ 천하대사에 상관있으랴!

영웅이/ 다정다감한 것 때문이었지.

  

전가백골 성회토,     全家白骨 成灰土,

일대홍장 조한청。    一代红妆 照汗青。

 

온 집안 백골은/ 누런 먼지가 되었지만

한 명의 미녀는/ 푸른 역사를 비추네.

 

14.

군불견                    君不见

관와초기 원앙숙,     馆娃初起 鸳鸯宿,

월녀여화 간불족。     越女如花 看不足。

 

그대는 보지 못하였던가!

관와궁 馆娃宮 낙성될 때에/ 원앙새 잠들었음을!

월나라 처녀는 꽃과 같아/ 자꾸만 보고 싶음을!

 

향경진생 조자제,     香径尘生 鸟自啼,

섭랑인거 태공록。    屧廊人去 苔空绿。

 

향초 따던 오솔길엔 먼지만 일고/ 새만 우네.

아름다운 음향 나던 마루에 사람은 떠나고/ 이끼만 푸르다.

 

15.

환우이궁 만리수,     换羽移宫 万里愁,

주가취무 고량주。     珠歌翠舞 古梁州。

 

우조의 노래 궁조로 바뀌고/ 만리에 수심만 가득

구슬 같은 노래, 비취의 춤은 옛 양주의 노래였건만...

  

 위군별창 오궁곡,     为君别唱 吴宫曲,

한수동남 일야류。     汉水东南 日夜流。

  

그대를 위해 부르리,/ 오나라 궁전의 노래를.

한수(漢水)만 무심히 동남쪽으로/ 밤낮없이 흐를 뿐.//

  

(감상)

어느 시대나 영웅(英雄)과 미녀(美女)의 이야기는 존재한다.

  

늘 재미있고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이야기가 망국의 시절과 겹치면

더욱 드라마틱하다.

  

명나라 말기의 장군 오삼계와 

그의 애첩 진원원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에게는 아주 유명하다.

 

오위업 선생이 명문을 남겨 놓았기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한족의 명(明)나라가

농민군의 반란으로 자멸(自滅)하고

결국 만주족의 청(淸)에게 멸망하였기에

이 이야기는 더욱

오늘날의 중국인에게 인기다.

  

드라마의 단골 주제가 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명의 장수 오삼계가 청나라 편을 든 것이

반란군의 수중에 빼았겼던

명기 출신의 여인 진원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영웅과 역사를 단순하게 본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글 중에 나오듯

기생출신의 여인하나가

어찌 천하대사를 좌지우지했으리오?

 

  

처자기응 관대계?     妻子岂应 关大计?

영웅무내 시다정。     英雄无奈 是多情。

 

여자가 어찌/ 천하대사에 상관있으랴!

영웅이/ 다정다감한 것 때문이었지.

  

  

명이 망(亡)한 것은

영웅과 여인때문이 아니라

망할 때가 되었기에 망한 것이다.

  

오래 쌓인 불만과 불평이

명나라 정부를 뒤엎은 것일 뿐이다.

  

 

미인이 

이 이야기에 단지 끼어든 것 뿐이다.

  

그런데 실상 이 세상은 남자가 반이고 여자가 반이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망국(亡國)과 흥국(興國)에

여자도 그 반의 책임은 있는 셈이다.

  

 

어찌되었든 청나라가 쉽게 북경을 점령한 것은

오삼계가 청의 편을 들어

이자성의 농민군과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 시를 지은 오위업의 입장에서는

오삼계가 명나라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워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그 후의 전개된 실제 역사는 신생국 청나라편으로 기울었고

결국 명도 오삼계도

모두 깨끗이 멸망하고 말았다.

  

언제나 망국(亡國)의 역사는 구슬프다.

  

망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비감(悲感)해하면서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그러기에 드라마의 단골메뉴가 되는 거겠지.

  

이 시를 쓴 오위업과 오삼계와 진원원은

모두 오나라와 관련이 있으니

강남땅은 언제나 문제가 있는 곳인가 보다.

  

요즘의 남경(南京)과 상해(上海)의 발전은

다 이런 연유가 있다고나 할까.

  

사연도 많고

이야기는 따라서 많을 수 밖에....

(2010. 4. 3)


 

(참고자료)

오위업 [吳偉業, 1609~1671]

 

중국 명말청초의 시인 겸 화가.

  

관직에 나가자마자 명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맛본 뒤

낙향했다.

  

10년간 절개를 지키다가

강압(强壓)에 의해 청조에 나아가 2년간 국자감 좨주 벼슬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낸 시인으로,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애국애족의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영사(詠史)시가 많다.

  

1,00여수의 많은 시로

망국(亡國)의 과거를 조상(弔喪)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장편의 칠언시(七言詩)로써

망국의 비극을 노래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전겸익(錢謙益) ·공정자(龔鼎孶)와 함께

강좌(江左)의 3대시인이라 불렸다.

  

주요 저서에는 《매촌집(梅村集)》등이 있다.

  

자 준공(駿公).

호 매촌(梅村).

장쑤성[江蘇省] 타이창[太倉] 출생.

  

명 숭정 4년(1631)의 과거에서 제2위로 진사가 됨.

1631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진사가 되어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동궁시독(東宮侍讀) 등의 벼슬을 하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청나라 조정의 요청으로 부득이 벼슬길에 나갔으나

2년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그 일을 후회하다가 죽었다.

  

청조에서의 관력은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이르렀다.

  

그는 

장편의 칠언시(七言詩)로써 망국의 비극을 노래한 많은 작품을 남겨,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폭풍시대의 증인이 되었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전겸익(錢謙益) ·공정자(龔鼎孶)와 함께

강좌(江左)의 3대시인이라 불렸다.

  

시인으로서도 유명하여 

그림은 동원(董源), 황공망(黃公望)에게 배워

정통적인 남종화를 그렸다.

  

동기창(董其昌), 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鑑) 등 

당시의 저명 화가와의 교우를 읊은

『화중구우가(畫中九友歌)』가 알려져 있다.

  

《매촌집(梅村集)》 40권,

《매촌가장고(梅村家藏稿)》 59권,

《말릉춘(秣陵春)》 《통천대(通天臺)》《임춘각(臨春閣)》 등의 저서를 남겼다.

  

문인 오위업은 장군 오삼계보다 3살 위이다.

  

  

  

  

이 시의 배경

   - 다음의 해설을 보면 이 시가 더욱 잘 이해된다.

 

  

 

17세기 중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명(明)나라는 

동북쪽으로부터는 만주족의 신흥국가 청(淸)의 공세를 받고

서쪽에서는 이자성(李自成)을 우두머리로 하는 농민 반란군 '유적(流賊)'이 쳐들어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에 시달리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자성의 난 [李自成의 亂]

 

 

1.

  

중국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1630~1640년대의 농민반란.

 

명나라 말기, 정치의 부패에 겹쳐

군사비 등의 증가에 따른 가혹한 수탈로

중국 백성들은 시달림을 받아왔는데,

1628년 산시[陝西] 지방에 대기근(大飢饉)이 일어나자

굶주린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는 명나라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에 있던 역참(驛站)을 폐지하였는데,

갑자기 생계를 잃은 역졸(驛卒)들과 

군량미를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도 반란에 가담하게 되어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초기의 반란지도자는 

왕가윤(王嘉胤)·고영상(高迎祥) 등으로,

그 무리는 3~4만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산시[山西]·허난성[河南省]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자성은 산시성 옌안[延安]에서 태어난 중농(中農)의 아들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목동·역졸·군인으로 전전하다가

굶주린 무리를 이끌고 반란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내어 

1631년 대장(隊長)이 되었고,

1636년 고영상이 전사한 뒤에는 수령이 되어

스스로 틈왕(闖王)이라 하였다.

  

그는 

다른 반란군 수령들이 투항한 후에도 

계속 항쟁을 벌여 세력을 떨쳤으며

허난[河南]에 이어 1641년 뤄양[洛陽]을 점령해서 복왕(福王)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이들의 집단은 군기가 엄한 것으로 이름이 났고

균전제(均田制)의 실시와 

조세(租稅)의 철폐 등을 반란 명분으로 내걸어

대대적인 호응을 얻었다.

  

1643년 시안[西安]을 점령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였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화폐를 발행하였다.

  

이어 당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공격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대의 주력부대는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산하이관[山海關]에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은 쉽게 함락되었다.

  

명의 마지막 임금인 숭정제(崇禎帝)는

황후(皇后) 주(周)씨를 자결케 하고

16세의 공주(公主)를 찔러 죽인 뒤

자금성(紫禁城) 뒤의 경산(景山)에 올라 홰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2.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農民軍)에게

자금성(紫禁城)이 포위되었을 때의 일이다.

  

황제(皇帝)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아침 조회(朝會)를 알리는 종을 쳤건만,

아무도 조정(朝廷)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청안이라는 충성스러운 환관(宦官)을 대동하고

경산 공원에 들어간 숭정제(崇禎帝)는 성안을 쓸쓸히 응시하다가

긴 소매자락 끝에 유언(遺言)을 남겼다.

  

"짐(朕)은 나약하고 덕망(德望)이 부족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샀도다.

폭도(暴徒)들이 짐(朕)의 수도(首都)를 점령했건만

신하(臣下)들은 모두 짐(朕)을 기만하였다.

짐(朕)이 죽어서도 조상(祖上)들을 뵐 낯이 없어

스스로 관면(冠冕)을 벗고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 얼굴을 가리노라.

폭도(暴徒)들은 내 몸을 갈가리 찢어도 좋으나,

백성은 한 사람도 해치지 말라." 라고 하고

목을 매고 자결하니

환관(宦官)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3.

  

명나라의 숭정제(崇禎帝)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1644).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창건한 뒤 

277년 만에

멸망한 명조(明朝).

  

이는 

중국사에서 유일하게 

남쪽에서 일어나 전국을 통일했던 왕조였고,

한족(漢族)이 세운 마지막 왕조였다.


  

명왕조의 멸망과 오삼계[吳三桂]

1.

  

명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정예부대를 이끌고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에 진을 치고

청나라 군대의 남하를 저지하는 33세의 젊은 용장 오삼계(吳三桂;1612~1678)

그런 명나라가 믿고 의지하던 기둥이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

숭정 연간 초기부터 

청나라에 대한 최전방 기지인 금주의 총사령관을 지내고 있는

유능한 군인이었다.

  

아버지의 연줄로 군대에 들어간 오삼계는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워

젊은 나이에 

영원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2.

  

오삼계는 집안 대대로 무장을 낸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 오양도 유명한 장군으로,

오삼계는 1612년 아버지의 근무지인 요동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오삼계는 오양의 공적 덕에

무장으로 등용되어 출셋길을 달렸다.

  

당시 요동에서 만주족이 흥기하여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1641년 장군에 임명된 오삼계는 

만주족을 막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됐다.

  

숭정 16년 10월, 이자성이 이끄는 반군은 동관을 공략하고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쳐들어올 태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명나라 제17대 황제인 숭정제는

오양을 불러들여 수도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때 오삼계도 

잠시 임지인 영원을 떠나 아버지와 함께 북경에 왔다.

  

이 북경 체류 기간에 오삼계는

그의 운명, 나아가서는 중국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한 미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중국 역사의 운명을 가른 진원원(陳圓圓)이다.

 

 

  

3.

  

북경에 도착한 오삼계는 때가 때인 만큼

어떻게든 명나라 최고의 용장과 연고를 맺어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는

상류층 인사들의 초대 공세에 시달렸다.

  

숭정제의 애첩이였던 전회의 아버지 전흥우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전흥우의 집에 초대된 오삼계는 산해진미가 차려진 잔치 자리에서

평소 소문으로 들었던

전씨 집안의 기녀 진원원(陳圓圓)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진원원(陳圓圓)

  

1.

  

진원원은 강남 소주 출신으로

본명은 진원(陳沅)이다.

  

가난한 농가에 태어난 그녀는

어렸을 때 고모에게 양딸로 보내졌다.

  

고모부는 행상을 다니며 장신구 따위를 파는 방물장수였지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난봉꾼이어서 

살림은 갈수록 쪼들렸다.

  

결국 고모는 진원원을 소주의 유곽에 팔아버린다.

  

타고난 미모에다 가무음곡은 물론

글을 읽고 쓰는 것에서부터

시를 짓는 법까지 당시 일류 기생에게 필요한 소양을 두루 갖추고 있던 진원원은

당장에 인기 절정의 기녀가 되었다.

  

아마 고모는 처음부터 기생으로 만들 속셈으로

진원원을 양딸로 삼아 밑천을 들여서 가르쳤을 것이다.

  

진원원은 쑤저우(蘇州) 출신의 명기(名妓)로,

외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가 뛰어나고 재주도 많았다.

  

  

2.

  

숭정 15년, 

우연히 소주를 방문한 전홍우田宏遇

돈과 권력으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진원원을 기적에서 빼내어

북경으로 데리고 돌아갔다.

  

전홍우는 

바로 당시 황후인 전비의 부친이었다.

  

그는 천자가 자신의 딸을 총애하지 않음에 

애가 탔다.

  

그러기에 원래의 목적은

숭정제의 총애를 받기 위한 전비(田妃)가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아버지를 시켜 사람을 내려 보내

진원원을 불려 들였던 것이다.

  

이때 전홍우는 진원원의 양어머니에게

몸값으로 2천금을 치렀다고 한다.

  

진원원은 곧 숭정제를 매료시켰지만,

지나친 미모와 요기가 문제였다.

  

결국 어의들의 만류로 

후궁으로서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다시 전씨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3.

  

오삼계가 

북경의 전씨 저택에서 진원원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였다.

  

진원원에게 첫눈에 반한 오삼계는

곧 전홍우에게 거금 1천냥을 지불하고 

그녀를 넘겨받았다.

  

때는 숭정 16년 10월,

오삼계는 32세, 

진원원은 아직 20세 안팎이었다.

  

진원원으로서도 

60고개를 넘은지 오래인 교활한 노인 전홍우보다는

씩씩하고 젊은 무장 오삼계가 훨씬 바람직한 상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삼계와 진원원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숭정제의 명령으로 오삼계는 산해관을 지키기 위해

다시 영원의 군사기지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그래서 

오삼계는 북경에 남는 아버지 오양에게 진원원을 맡기고

아쉬운 마음으로 북경을 떠났다.

  

진원원을 바로 첩으로 삼은 오삼계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근무지로 떠났다.

  

명나라가 오삼계를 영원(닝위안)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닝위안에 위치한 산하이관(山海關)이

요동에서 베이징으로 통하는 군사 요충지이자 최후의 방벽이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숭정 17년 1644년에 접어들자마자 

사태가 급변한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쳐들어오고 

농민 반란이 거세졌다.

  

그리고 이자성이 북경성을 점령했다.

  

이자성 군대의 북경 함락,

숭정제의 자살,

명왕조의 멸망으로

정세가 어지럽게 변하는 가운데,

오삼계는 

일단 이자성의 부름에 응하여

병력을 이끌고 북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진원원이

이자성 휘하의 흉포한 무장 유종민(劉宗敏)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얻자,

격분하여 태도를 표변시켰다.

  

청나라에 투항하고 

원군을 얻어서

이자성에게 창끝을 돌린 것이다.

  

이리하여 오삼계는 

여자 하나 때문에 청나라에 몸과 조국을 팔아

중국이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계기를 마련한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청군의 북경 입성

  

1.

  

1644년 명(明)은 

숭정제(崇禎帝) 죽음 후

분명히 멸망(滅亡)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軍隊)는

산해관(山海關)에 건재해 있었다.

  

이 군단의 지휘관(指揮官)은 

평서백(平西伯) 오삼계로서

명나라 군부에서는 최고의 사령관으로 알려진 맹장이었다.

  

이자성이 자금성(紫禁城)을 점령함에 따라

천하의 형세가 결정되었다고 판단하고

각지의 행정기관은

흩어져있는 군에 신정권(新政權)에 투항(投降)하도록 권유하는

투항 권유문을 날렸다.

  

이자성은 

북경에서 은퇴하여 살고있는 오삼계의 부친인 오양에게

아들에게 항복 권고장을 써서 보내라고 명령했다.

  

오삼계는 영원의 군사와 민간인 50만 명을 이끌고

북경으로 구원하러 가던 중

북경이 마침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주에 주저 앉아있는 상태였다.

  

오삼계는 편지를 받고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항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북경과 서신왕래를 하던 중

북경의 애첩 진씨를 

유종민이 강제로 납치하여

자기 여자로 만들어 버렸음을 알게 된다.

  

오삼계(吳三桂)는 격노하여 

지금까지 대치하고 있던 청(淸)군의 힘을 빌어

이자성을 쳐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오삼계는 청나라에 반역한 것이므로,

청대 기록에 결코 좋게 쓰여질 리 없었겠지만,

애첩을 빼앗겨 분노했던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그가 청에 반역하기도 전의 문헌에도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은

나중에 날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이 당시의 이야기를 노래한 것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청초(淸初), 대(大)시인(詩人) 오위업(吳偉業)의 원원곡이다.

  

오위업의 시와 민간의 이야기들에 따르면

오삼계의 애첩이름은 진원원(陳圓圓)으로 되어있으나,

명사(明史)에는 진원(陳沅)으로 되어있다.

  

오위업의 원원곡에는

숭정제(崇禎帝)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삼계(吳三桂)가

역적을 쳐서 북경을 수복하기 위해

산해관(山海關)을 떠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전군(全軍)이 황제의 죽음을 듣고 

상복을 입은 후 통곡했다는 것인데,

오삼계가 노발대발한 것은 이자성의 북경 함락때문이 아니라

진원원이 악명높은 유종민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원원곡은 노래하고 있다.

  

  

3.

  

한편 반란군의 이자성은

숭정제(崇禎帝)의 태자와 

오삼계(吳三桂)의 아버지, 진원원 등을 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향했다.

  

거용관 총병 당통은

별동대(別動隊)를 이끌고 

오삼계(吳三桂)를 협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오삼계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에 오삼계는 

청나라에 보내는 청원서(請願書)에

영토를 할양하겠다는 얘기도 쓰게 된다.

  

청나라는 출병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이제 오삼계는 청과 손잡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관문(關門)을 열고

청군과 함께 이자성군을 격파하게된 것이다.

 

  

  

4.

  

이자성군은 참패(慘敗)하여 

영평까지 패주(敗走)했다.

  

그러자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인질삼아 

화의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미 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오삼계는

이런 제안을 일축하고 추격을 계속했다.

  

그 때문에 이자성은

그 자리에서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을 죽이고

북경(北京)으로 귀환(歸還)해

북경에 있던 오삼계의 식솔(食率)들을 몰살시켰다.

  

1644년 4월29일 이자성은

자금성(紫禁城) 무영전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황제(皇帝)가 되었다.

  

전형적인 농민반란군의 행태를 

이자성도 닮아간 것이다.

  

자금성의 금장식들을 녹여 금괴로 만든 이자성은

그날 밤 궁전과 성루(城樓)에 불을 지른 후

이튿날 30일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다.

  

  

  

5.

  

1644년 5월1일 

청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이제 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삼계는 운남의 평서왕에 봉해졌다.

  

그가 명나라에서 받은 작위는 백작이었으므로

이 공적은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훗날 일가를 전멸 당했다.

  

또 천하를 만주족(滿洲族)에게 팔아 넘겼다는 오명도 뒤집어썼다.

  

오삼계가 이자성에게 투항했더라도

명 왕조가 순조롭게 정권을 유지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성무기(聖武記)에는 오삼게가 청에 투항한 동기를

'가족을 역적에 빼앗겨'라고만 되어 있을 뿐

별 얘기가 기록되어 있진 않다.

  

  

  

  

원원곡 해설

  

  

명말청초에 굴절된 삶을 살았던 시인 오위업(吳偉業;1609~1689)의 시로

<원원곡(圓圓曲)>이 있다.

  

정호(鼎湖) 당일(當日) 임금이 세상을 떠난 날

적을 쳐부수고 서울을 지키려고 옥관(玉關)을 내려간다.

  

육군(六軍)이 통곡으로 모두 호소(縞素)를 걸쳤으나

분노가 관(冠)을 찌르는 것은 

바로 잃어버린 홍안(紅顔) 때문.

  

  

그날 황제가 정호(황제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하여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자,

오삼계는 적(이자성 군대를 가리킴)을 격파하고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산해관을 달려 내려간다.

  

전군 병사들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여 모두 목 놓아 울면서

호소(흰 상복)을 몸에 걸쳤지만

오삼계가 분노로 곤두선 머리털이 하늘을 찌를만큼 격분한 것은

오로지 아리따운 미녀 진원원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제압한 뒤에 지어진 시이기 때문에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서 오위업은 

오삼계가 격분하여 변심한 것은

진원원 때문이었다고 분명히 단언하고 있다.

  

이리하여 한족이 세운 명은 망하고 

여진족의 청이 

중원의 패자가 된다.

  

결국 농민 반란군인 이자성의 군대는

곧 오삼계(吳三桂) 군대에 대패하여

베이징에서 시안으로 후퇴하였다.

  

이자성은

청나라 군대의 추격을 받고

후베이[湖北]로 달아나 자살하였다.

  

  

  

  

  

그 후의 이야기

 

  

1.

  

청의 북경 입성후 

오삼계는 운남지역의 평서왕에 봉해졌다.

  

이 권한을 이용해 

오삼계는 운남과 인근 구이저우(貴州)에

독립적인 번국(藩國)을 세워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멋진 궁전을 지었다.

  

오삼계가 운남 쿤밍에 

진뎬(금전: 金殿)을 재건(再建)한 데에는

연인인 진원원을 위해서였다.

  

번왕이 된 오삼계는 

독자적인 왕국을 꾸리고

왕궁을 세웠다.

  

진뎬은 높이 6.7m, 너비 7.8m에 달하는데 

모두 청동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기둥, 지붕, 문 등이 청동으로 무게가 200톤을 넘는다.

  

건물 안에는 

신선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오삼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

  

대들보에는 쿤밍의 아름다운 풍광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진뎬은 

청동으로 만든 중국 4대 동전(銅殿) 중 하나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고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하다.

  

  

  

2.

  

진뎬을 만들만큼 

오삼계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며 

진원원의 미모도 퇴색한다.

  

오삼계는 왕이 된 뒤 왕비로 다른 여자를 세우고

여러 명의 첩을 두면서 

진원원을 멀리했다.

  

진원원도 곡절 많은 인생에 무상함을 느껴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

  

  

뒷날 강희제가 철번정책을 단행하자

1673년 오삼계는

상가희, 경정충과 함께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황제 자리까지 오르지만 

1678년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진원원도

오삼계가 죽은 후에 비구니로 죽었다.

  

할머니 비구니가 되어 죽었다.

  

오삼계 사후

삼번의 세력은 약해져 1681년 멸망했다.

  

후대인들은 

오삼계가 진원원 때문에 명나라를 배신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말이다.

  

윈남성의 쿤밍에 있는 진뎬은

이런 오삼계와 진원원의 애정사가 숨어 있다.

  

  

오삼계의 최후

 

삼번의 난 [三藩-亂]

 

1673~1681년에 걸쳐

오삼계(吳三桂)·상가희(尙可喜)·경중명(耿仲明) 등의 삼번이

청(淸)나라에 대하여 일으킨 반란.

 

만주인(滿洲人)의 왕조인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을 때,

농민 반란 진압에는 

항복한 많은 한인(漢人)이 투입되었다.

  

특히 오삼계·상가희·경중명은

그들 자신의 군단(軍團)을 이끌고 나가 

큰 공을 세웠다.

  

그로 인해 중국이 평정된 뒤

청나라는 오삼계를 윈난[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상가희를 광둥[廣東]의 평남왕(平南王),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耿繼茂)를 푸젠[福建]의 정남왕(靖南王)으로 봉하였다.

  

그들은 각기 번부(藩府)를 설치하여,

군사권·재정권을 갖는 독립정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삼번이 

청나라의 중국 지배체제와 대립함으로써

강희제(康熙帝)는 상가희가 요동으로 은퇴하였음을 핑계로

철번(撤藩)을 명하였다.

  

1673년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어서 1674년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耿精忠)이,

1676년에는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尙之信)이 

반란에 호응하였다.

  

각지에서 반청(反淸)세력이 이에 동조하여

한때는

양쯔강[揚子江] 이남 일대,

쓰촨[四川]·산시[陝西]가 그들 지배에 들어갔다.

  

1678년 67세의 오삼계는 

후난[湖南]에서 고립되어

그 해 8월에 죽고,

그를 이은 손자 오세번(吳世藩)도 1681년에 자살하자

마침내 삼번의 난은 모두 청조에 의해 평정되고,

청나라의 중국 지배권은 확고하게 되었다.

  



 

 

진원원(???)의 원래 성은 형(邢)이고, 이름은 원(沅)이며 자(字)가 원원(??)또는 원방(?芳)이다.

어렸을 때 양모(이모라고도 함) 진씨(?氏)를 따라 살았으므로 성을 진?씨로 고쳤다.

그녀의 용모는 아름답기가 꽃보다 밝고 눈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노래와 춤을 잘 하였으며 여러 가지 재주가 그 시대의 으뜸이었다.

숭정(崇?)황제 말년에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봉기군이 조정을 흔들고 위협하였다.

숭정황제는 매일 밤 불안하였다.

외척(外戚)중의 한 사람이 절색미녀를 찾아서 황제에게 바침으로 황제의 걱정하는 마음을 풀고 편안을 주고자 하였다.

그 명령을 받은 전비(田妃)의 오래비 전원(田?)이 강남으로 미녀를 찾아 떠났다.

전원은 소주에서 기녀로 있는 진원원을 찾은 후에 그 자색에 취하여 사사로이 그녀를 취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자성의 군대가 임금이 있는 수도 가까이에 쳐들어오자

숭정제는 급히  산해관(山海?)을 지키던 장군 오삼계(?三桂)를 불렀다.

전원은 농민 봉기군에 대해  근심과 걱정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봉기군을 쳐부수기 위한 오삼계의 출병 송별연을 성대히 베풀었다.

그 송별연 자리에 진원원을 데리고 가 노래를 하게 하였다.

오삼계는 진원원을 본 후 그 마음이 몹시 흔들려 기쁜 마음으로 진원원을 술 자리에 배석케 하였다.

술이 세 번 돌았을 때 돌연 농민 봉기군이 쳐들어왔다는 경보가 울렸다. 

전원은 두려움으로  앞에 있는 오삼계에게 말하였다.

“도적들이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하리요?”

오삼계가 말하였다.

“진원원을 내게 주면 내가 먼저 그대의 가정을 별 탈없이 보호 하겠소!”

전원이 급히 그러마고 대답하였다.

오삼계는 즉시 진원원을 데리고 작별을 고했다. 

오삼계는 당시 어영을 감독하던 부친에게 말하기를 진원원을 경성부(京城府)에 남겨두어

황제로 하여금 그녀를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이 북경에 진입한 후 오삼계의 아버지는 그만 봉기군에게 투항해버렸다.

그리고 진원원도 이자성의 부하에게 빼앗겨버렸다.

그때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투항 답을 기다릴 때 였는데 이미 진원원은 이자성의 부하의 소유물이 되어 있었다. 

이에 노기 충천하여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대장부가 스스로 가족조차 돌 볼 수  없다면 어찌 살겠는가?”

하며 청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농민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오매촌(?梅村)이며 원원곡《??曲》 중에 이렇게 쓰여 있다.

“통곡육군구고소(?哭六?俱?素),육군(六?)이 함께 흰 상복을 입고 통곡하니

 충관일노위홍안 (?冠一怒???), 노기충천하여 붉은 얼굴이 되었네.

 

이자성은 전쟁에 패하하자, 오삼계의 아버지와 가족 38인을 모두 살해한 후 북경 밖으로 도망을 하였다.

오삼계는 아버지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은 원한을 안고 농민군을 추살하기 위해 산서성까지 갔다. 

이때 오삼계의 부장이 경성에서 진원원을 찾아 데리고 말을 타고 오삼계에게 보냈다.

오삼계는 진원원을 데리고 촉(蜀) 땅에 들어선 후 홀로 운남을 차지하고 순조롭게 다스렸다. 

오삼계는 자신이 운남왕에 봉해지자 진원원을 정비(正妃)로 세우고자 하였다.

진원원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사양하였다.

이에 오삼계가 다른 사람을 취하였다.

정비로 취한 여자는 질투심이 많아서 오삼계의 애첩들을 모해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진원원은 홀로 별원에 거처하고 있었다. 

진원원도 총애를 잃은 후 오삼계에 대해 점점 마음이 떠났다.

이에 오삼계가 그녀를 죽일 음모를 꾸몄고 이를 알게 된 진원원은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부터 오화산 화국사(五?山 ??寺)에 들어가 일년 내내 부처님만 섬겼다.

후에 오삼계가 운남을 독립국으로 선포하자 강희제(康熙帝)가 운남에 출병하여 1681년에 곤명성을 파괴하고  오삼계는 죽었다. 

오삼계가 죽자 진원원도 또한 스스로 절밖에 있는 연화지(?花池)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죽은 후 연못 옆에 묻혔으며 청나라 말까지 그 무덤이 있었다.

절에는 진원원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연못 옆에는 그녀가 쓴 시가 석각(石刻)되어 있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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