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 이야기

***심심해서 여기저기 뒤져가며 읽어본 글 ***

 

요즘 들어서 조금 관대해진 느낌이 있긴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동본의 결혼은 법으로 엄하게 막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근친간의 혼인은 유전자에 악영향을 미쳐 후세에 좋지 않은 결과를 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근친간의 결혼을 막았던 것은 아닐 것이고 옛날로 한번 돌아가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나라가 본래부터 동본간의 혼인을 금기시 해왔을까. 물론 아니다.


신라시대의 예

근친혼이 가장 성행했던 시대와 나라는 역시 신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엄격한 골품제 아래에서 요즘 섞어찌개를 끓이듯 신분을 섞을 수는 없었을 테니 성골(聖骨)은 성골끼리, 진골(眞骨)은 진골끼리 혼인을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김춘추와 김유신이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언니에게서 오줌 누는 꿈을 사서 김춘추에게 시집을 가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이야기 역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부터 신라의 성골 체제가 진골로 돌아가는 계기가 됨을 상기하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김춘추(태종무열왕)는 성골이 분명하지만 김유신은 가야 출신의 방계 진골에 불과하다.

 

마찬가지인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을 하게 되면서 역사는 태종무열왕부터 진골의 시대로 기록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얽힌 관계이다. 문명왕후 문희는 김춘추와의 사이에서 인문(仁問), 문왕(文王)등의 아들과 딸을 낳는데 이 딸이 나중에 김유신의 지소 부인이 된다.


막내 여동생의 딸을 데려다 부인을 삼은 것이다. 요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되지만 당시 신라의 왕실은 오히려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법흥왕의 딸은 작은 아버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진흥왕이고, 어머니는 사촌 누님이다.


역시 진흥왕은 아버지인 입종의 딸을 아들인 태자 동륜과 결혼을 시키니 동륜은 자신의 고모와 결혼을 했고, 동륜의 아들 진평왕은 갈문왕(임금의 동생을 갈문왕이라 함) 복승의 딸 마야부인 김씨와 혼인을 했으니 역시 4촌 사이이다. 그리고 한사람과의 관계가 매제도 되고 장인이 되기도 하는 겹겹의 족내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근친혼의 이유

물론 신라가 남부를 통일하고 남북국 시대로 이어졌을 때는 이러한 근친 족내혼을 당에게 간섭 받기도 했지만 정권의 유지와 골품의 특권은 이것을 무시하게 했고 결국은 고려시대까지 이러한 풍습을 잇게 한다. 다시 말해 권력과 맞물려 돌아간 것이 근친혼의 내막이라고 보면 된다.


34대 효성왕(737-742)은 박씨와 혼인을 하고 당의 책봉을 받았는데, 김춘추 이후의 왕비가(王妃家)였던 김씨들의 압박에 못 견디고 결국 이찬 김순원의 딸을 다시 왕비로  받아들임으로써 위기를 면하게 된다.


장인이 된 김순원은 효성왕의 아버지인 성덕왕의 장인이기도 했으니 효성왕은 이모와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근친혼이란 신라의 ‘신국(神國)의 도’였다. 전혀 도덕적으로 규탄의 대상이 아니었음은 물론 오히려 중국의 법도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는 자부심으로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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