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1993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은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제임스 A.헵번 레스톤과 네덜란드의 유서깊은 남작가문 출신의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때 영국으로 건너갔고, 6살때 런던 교외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2차대전이 일어난 후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고국 폴란드에서 지냈다. 이시절 오드리 헵번은 나치점령 하에서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등 온갖 고초를 겪었는데, 이 시절의 수난과 가난이 그녀로 하여금 훗날 어린이들의 가난 구호에 앞장서게 한 것이라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19살때 단신으로 런던으로 가서 발레리나 수업을 받다가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띄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젊은 아내의 이야기>, <첫사랑> 등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던 중 여성작가 꼴레트를 만나게 된다.

꼴레트는 자신의 작품 <지지>를 뉴욕에서 공연할 때 오드리 헵번에게 주연을 맡겼는데,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지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연극 공연을 보았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그녀를 <로마의 휴일>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은 청순하고 여린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하오의 연정>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에 출연했으며,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처음 개런티 백만 달러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년 동안 15편의 영화에 등장하며서 비평가와 흥행가를 동시에 석권하여 인기가도를 달렸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펙에 이끌려 미장원에 들러 짧게 깎은 '햅번스타일'의 쇼컷트, <사브리나>에선 맘보 바지를 세계에 유행시켰다.

오드리 헵번은 두 번 결혼했는데, 1954년 영화배우 멜 파라와 결혼했으나 68년에 이혼하고, 2년뒤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다.

그러나 1981년 이혼한 이후 그녀는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홍보대사가 되어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돌보는 등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섰다. 오드리 헵번은 1992년 9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한 뒤 대장암에 걸린 사실을 발견하고 11월 수술을 받았으나 1993년 자택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Global Vision for Peace)'은 장기간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2003년 12월 설립된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은 지뢰 제거, 전쟁지역에서 농작물 가꾸기, 대량살상무기 폐기 등의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달라이라마와 5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수전 서랜던 등 유명 영화배우 등이 대표적인 지지자이다. 이 운동의 상징인 '평화의 비둘기' 핀은 유명 영화배우들이 착용한 뒤 인터넷 경매로 팔아 단체 기금을 충당하고 있다.

'오드리 헵번 평화상' 수상자는 문인과 철학자, 시각예술가 및 연예인,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선정되는데, 수상자에게는 '평화의 비둘기' 핀이 수여되고 '유엔의 친구'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2004년 1회 수상자는 여배우 드류 배리모어가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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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
출연
오드리 헵번, 조지 페파드
개봉
196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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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drey Hepburn - Moon River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달빛이 흐르는 넓은 강아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난 언젠가 널 멋지게 건너겠어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오, 내 사랑을 부셔버린 당신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당신이 어딜 가던지 난 따라가겠어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세상밖의 두 포류자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세상 많은것을 보았지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린 무지게 양쪽 끝에있어
Waitin around the bend my huckleberry friend, 
내 허클베리 친구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Moon river, and me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달빛이 흐르는 넓은 강아)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난 언젠가 널 멋지게 건너겠어)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오, 내 사랑을 부셔버린 당신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당신이 어딜 가던지 난 따라가겠어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세상밖의 두 포류자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세상 많은것을 보았지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린 무지게 양쪽 끝에있어
Waitin around the bend my huckleberry friend, 
내 허클베리 친구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Moon river, and me
달빛이 흐르는 강과 나
 
오드리헵번은 유명한 배우로서 삶을 살았지만,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2번의 이혼과 3변째 만남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은퇴후 유니세프에서 친선대사로 활동
​전 세계 빈국을 찾아 봉사활동으로 남은 여생을 보내다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드리햅번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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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 중에서도 오드리 헵번은 절대 타락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연약한 성인(聖人)이며, 다치기 쉬워 보이나 또한 섬세한 우아함까지 지녔다. 여려 보이지만 결코 압력에 짓눌려서 무너지는 법이 없었고 연기생할에서 은퇴하여 유니세프의 어린이를 위한 대사가 되었을 때(그때는 아직 유명인들의 자선 활동이 유행하기 전이다) 얼마나 확고한 몰두와 헌신으로 그 일을 해내었던지 완고하고 무감각한 정치인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국제적 외교사절이라는 직업은 그녀의 인생과 연기 경력의 논리적인 완결이었다.

헵번은 진정한 세계주의자의 원형이었다. 브뤼셀에서 네덜란드인과 영국의 아일랜드인 부부(어머니는 여남작이었고 아버지는 은행가였다)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자랐고 2차 대전 동안 나치 점령 하에서 지냈다. 나치 치하에서 너무나 심한 고난을 목격했기 때문에 「안네의 일기(1959)」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후에 그녀가 거식증으로 고생한 것도 전쟁 동안 겪은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주장도 종종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전쟁 동안 튤립 구근을 먹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헵번은 암스테르담에서 모델로 활동하다가 파리와 런던에서 단역들을 맡으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고(가장 눈에 띄는 출연작은 「라벤더 힐 몹(1951)」), 그러다가 1953년에 로마에서 로케이션 촬영으로 만든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에 공주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로마의 휴일」은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유럽의 몇몇 도시들에서의 그녀의 멋진 모습을 담은 화면들을 포함시키면서 그녀의 코스모폴리탄적 배경을 잘 활용했고 영화가 끝날 무렵 그녀는 기자 회견 장면에서 네덜란드어로 몇 마디를 말하면서 그녀의 뿌리가 유럽에 있음을 멋지게 드러냈다(헵번은 다섯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이 재능은 후에 그녀의 인도적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의 휴일」의 성공은 헵번을 순식간에 세계무대로 도약하게 했고 겨우 스물네 살의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곧 1954년에는 「운디네」로 토니상(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나날이 커져가는 그녀의 명성은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았고 그들은 그녀를 현대적인 젊은 여성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영국의 언론들은 서로 헵번이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려 애썼지만, 이제 그녀가 전 세계에 속한 사람이란 것은 분명해져 있었다.

이후 헵번의 영화 경력은 길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집중적이지도 않았지만?그녀는 1953년부터 1967년 사이에 겨우 15가지의 주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영화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통일성을 구축하고 있다. 헵번이 영화에서 연기한 역할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교육과 관련된 것이었다. 「로마의 휴일」에서도 그녀가 여유로운 기분전환을 위해 엄격한 교육에서 달아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상대역 그레고리 펙이 여전히 그녀에게 세상의 방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와 유사하게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인 「사브리나(1954)」와 「파계(1959)」, 「아이의 시간(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그리고 「마이 페어 레이디(1964)」를 보면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의 매력이 언제나 교육과 노력과 적절한 예의범절과 관련되어 있음이 강조된다. 헵번이 모든 교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라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 스타에서 국제적인 외교사절로
1958년에 그녀는 자신이 브로드웨이에서 그 인물을 창조해 내는 데 일조했던 「지지」의 영화판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그 역은 프랑스 태생의 여배우 레슬리 카론에게 갔다). 1960년대 후반부터 헵번은 점점 연기에서 멀어져 국제적인 외교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니세프와 함께 활동했다.

그 일을 얼마나 유능하게 해내고 또 그로 인해 큰 존경을 받았는지, 그녀가 (1993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1989)」에서 신의 역을 연기한 것이 전혀 젠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녀는 진짜 천사처럼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위트와 매력으로써 그 역할을 연기해 냈다. 이 깜찍한 여배우는 두 번 결혼했다. 배우 멜 페러와 닥터 안드레아 도티가 그 상대였고 그들에게서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다. 1990년에 튤립의 한 품종이 그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앙증맞은 검은 드레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 고라이틀리는 그 드레스를 입고 뉴욕의 택시에서 우아하게 내려 티파니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종이봉투에 담긴 아침을 먹는다. 2006년 12월, 헵번이 입었던 바로 그 작은 드레스(오른쪽)는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41만 파운드에 팔려, 영화에서 입었던 드레스 중 가장 비싼 그리고 가장 유명한 드레스가 되었다.

지방시가 디자인한 그 드레스는 영원한 스타일의 아이콘으로서 헵번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헵번은 패션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의 뮤즈였다. 그는 「사브리나」와 「퍼니 페이스」, 「샤레이드」, 「백만 달러의 사랑」 등 헵번의 가장 유명한 영화에서 그녀의 의상을 담당했다. 사이즈 6의 바닥까지 끌리는 검정 칵테일 드레스는 몸에 딱 맞는 몸통 부분과 등이 깊이 파이고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다. 헵번의 진정한 박애활동을 생각해보면 그 드레스의 판매액이 인도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단체인 시티 오브 조이 에이드에 보내진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항상 겸손했던 헵번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외양은 쉽게 따라할 수 있어요. 여자들이라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사서 쓰고 작은 민소매 드레스만 입으면 오드리 헵번처럼 보일 수 있답니다." 그녀의 첫 번째 히트 영화 「로마의 휴일(1953)」 이후 전 세계 수백만의 여성들은 헵번처럼 보이고 싶어 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내가 이런 얼굴을 가지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출처 : 501 영화배우-마로니에북스

 

 

 

1990 영혼은 그대 곁에
 
 
영혼은 그대 곁에 제 4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세실 B. 데밀 상)
1965 샤레이드
 
 
 
 
 
제 1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영국))
 
1960 파계
제 1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영국))
제 25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1954 로마의 휴일
제 2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제 1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드라마)
제 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영국))
제 1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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