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명장들은 자리가 높아질 수록 언제나 모함을 받기 마련이다. 남북조시대에도 이러한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난릉왕 고장공(高長恭) 역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또한 고장공이 죽자 얼마 안 가 북제도 사라지고 말았다. 

고장공의 원래 이름은 고효관(高孝瓘)이며 장공(長恭)은 자(字)이다. 할아버지는 북위를 분할하여 동위를 연 고환(高歡)이고 아버지는 북제 문양제로 추대된 고징(高澄)이며 고장공은 고징의 4남인데 <북사>에서는 3남으로 나와 있다.즉 북제의 황실 일가인 셈이다. 

원래 고씨 일가는 선비족인데 한족화한 집단이었다. 고씨 일가는 나라를 세운 뒤 국호를 제(齊)라고 했으나 남조의 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제라 부른다. 

하청3년(564) 고장공이 병주자사가 되어 진양에 들어왔을 때 돌궐이 침공해왔다. 고장공은 이를 격퇴하여 용맹을 떨쳤고 그해 겨울 12월에 북주가 낙양으로 쳐들어 왔다. 고장공은 명장 곡률광(斛律光)과 함께 출전하여 북주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장공은 단소(段韶)의 계책에 따라 군을 3갈래로 나누어 북주 군을 압박하였고 고장공은 5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주 군을 돌파하고 낙양성 아래 다다랐는데 당시 전세가 위급한 상황이어서 성 안 사람들은 원군을 식별하지 못했다. 고장공이 이 때 투구를 벗어 얼굴을 보이자 사람들은 드디어 고장공이 왔음을 알고 사기가 올라 북주 군과 맹렬히 싸웠고 북주 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북제서 문양육왕전>에는 "망산의 패(敗)"라 하여 북제가 패한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북제가 북주를 이긴 것은 분명하므로 이는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병사들이 이 전투를 기려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이를 "난릉왕 입진곡(蘭陵王入陣曲)"이라고 한다. 고장공은 사주목, 청주, 영주자사를 역임했고 상서령, 녹상서사, 대사마에 올랐다. 고장공은 단소 등과 함께 정양을 토벌하여 다시 한번 전공을 세웠다. 

이 무렵 천통1년(565) 북제에서는 태자 고위(高緯)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후주이다. 후주 고위는 여느 북제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고장공에게 비록 재상직을 주었지만 실상 고장공을 시기하고 있었다. 고장공은 후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재물을 가로채는 등의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무평2년(571) 고장공은 세상을 떠난 단소의 병력을 이어 받아 자신이 지휘하여 북주와 싸워 승리했는데 여기서도 전리품을 챙기기 바빴다. 그러자 중군 위상원(尉相願)이 이렇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지금 일부러 명성을 떨어뜨리려 하시는데 만약 이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간사한 자들이 이것을 일러 바치면 이러한 행동 또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마땅히 칭병히여 집에 머무시고 하시는 일을 맡겨버리십시오 ." 

고장공은 은퇴할 생각을 품었지만 1년 뒤 고장공과 더불어 북제 제일의 명장인 곡률광이 북주의 명장이었던 위숙유(韋叔裕)의 모략에 넘어간 후주 고위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북제를 지탱하던 곡률광이 죽자 어쩔 수 없이 군사를 계속 지휘할 수 밖에 없었던 고장공은 무평4년(573) 남조 진(陳)나라와 싸웠지만 패하고 고장공을 늘 경계하던 후주 고위는 이를 핑계로 고장공에게 사약을 내렸다. 

고장공은 죽기 전에 아내 정씨(鄭氏)에게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충성을 다해 황제를 섬겼는데 황제가 나를 버리고 이렇게 짐독을 내리는가?" 

그러고는 결국 독을 마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장공이 죽고 4년 뒤 북주는 북제를 공격했고 후주 고위는 제위를 버리고 도망쳤다. 고장공의 형제였던 광영왕 고효형(高孝珩), 안덕왕 고연종(高延宗) 등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끝내 북주 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북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북제서 문양육왕전>에는 고장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공은 용모가 매우 부드러웠으나 마음은 굳세었고 목소리와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장군인데도 세세한 일도 직접 처리했고 매우 맛있는 음식이나 심지어 오이 하나를 먹을 때도 여러 개로 나누어 병사들과 함께 먹었다. 처음 영주에 있었을 때 행참군 양사심(陽士深)이 뇌물 죄로 관직이 삭탈되었는데 훗날 고장공 밑에 들어오게 되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고장공은 가볍게 처벌만 하고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무성제는 장공에게 공을 치하하고 시첨 20명을 주었지만 단 한사람만 받았다. 죽기 전에 천금의 채권이 있었지만 모두 불태워 버렸다." 

고장공은 아랫사람이 죄를 지어도 죽을 죄가 아닌 이상 왠만해선 아량을 베풀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런 고장공을 좋아했고 또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은 척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안타까워 했다.  

덧붙여서 북제가 멸망하게 된 원인으로 황제에 올랐던 고씨들이 희한하게도 한결 같이 어리석은 탓도 있겠지만 북주에 비해 북제가 호(胡), 한(漢)족이 서로 융합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고 본다. 북주를 세운 우문태, 수나라를 세운 양견, 당나라를 세운 이연의 조상은 모두 북위의 6진 중 하나였던 무천진 출신이다. 

북방 민족들은 살기 좋은 남쪽으로 내려왔고 한족들은 전란과 죄를 피해 북으로 이동했는데 무천진과 같은 6진 지역은 이러한 인구 이동으로 서로 간의 문화가 교류되는 가교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한족이 호화되거나 호족이 한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선비족인 우문태는 한화되었고 양견이나 이연도 원래는 한족인데 북방 민족의 문화에 익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집단이 농서 지역에서 북주를 세웠고 이를 중국에서는 "관롱(關隴)집단"이라 한다. 이 관롱집단은 북주에 이어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웠다. 

 어쨌든 고장공은 북제의 마지막 보루였고 고장공이 죽자마자 북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 역시 때를 잘못 만난 불행한 명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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