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황후(衛皇后) - 자부(子夫)

위황후(衛皇后)의 자는 자부(子夫)인데 그의 출신은 미천하다. 그녀의 가호(家號)는 위씨(衛氏)로 평양후(平陽侯)의 영읍(領邑) 사람이다.

자부는 원래 평양공주의 가희(歌姬)였다. 무제(武帝)는 처음 즉위하여 여러 해 동안 자식이 없었다. 평양공주는 양가(良家)의 여자 10여 명을 물색하여 화장을 시켜 집안에 배치해두었다. 무제가 패상(覇上)에서 불계(祓禊)를 끝내고 돌아올 때 길에서 평양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시중을 드는 미인들을 받쳤으나 무제는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마신 후 가희가 들어와 노래를 하였는데, 무제가 이를 바라보더니 위자부(衛子夫) 한 사람만을 좋아하였다. 이날 무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자 자부가 시중을 받들었는데, 경의실(更衣室)에서 총애를 받았다. 무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는데 기분이 매우 좋았으므로, 평양공주에게 금 1,000근(斤)을 하사하였다.

공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자부를 입궁시키라고 주청하였다. 자부(子夫)가 가마에 오를 때 평양공주는 그녀의 등어리를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가거라. 몸조심하고 위로 올라가도록 노력하라! 만약 존귀하게 된다면 나를 잊지 말아라' 라고 하였다. 자부가 입궁한 지 1년여가 되었지만 마침내 더 이상은 무제와 동침하지 못하였다. 무제는 그런 중용되지 못한 궁인들을 골라서 궁에서 내보내 집으로 돌려보냈다. 위자부는 무제를 볼 기회가 있자 눈물을 흘리면서 출궁(出宮)을 간청하였다. 무제는 그녀를 매우 가련히 여겨 다시 동침을 하였으며, 마침내 자부는 잉태하였는데, 이로써 존귀와 총애가 날로 더하여갔다. 무제는 그녀의 오빠 위장군(衛將軍), 동생 위청(衛靑)을 불러들여 시중(侍中)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위자부는 후에 늘상 무제와 동침을 하는 커다란 총애를 받았으며 모두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거(據)이다.

당초에 무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장공주(長公主)의 딸을 취하여 비가 되게 하였다.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비는 황후가 되었으나, 성이 진씨(陳氏)인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무제는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대장공주(大長公主)는 적지 않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진황후(陳皇后)는 교만하고 거만하였다. 그녀는 위자부가 커다란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분노를 느꼈으며 화가 나서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무제는 더욱더 노하였다. 진황후는 몰래 여자를 시켜 저주하게 하였는데 그 일은 발각이 되었다. 이리하여 진황후는 폐출되었고 위자부가 황후가 되었다.

진황후의 모친 대장공주는 경제의 누이였는데, 무제의 누이인 평양공주를 여러 차례 책망하기를 '황제는 내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설 수가 없었는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딸을 버렸으니 자애(自愛)를 알지 못하고 본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평양공주는 '자식이 없는 이유 때문에 폐출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황후는 아들을 낳으려고 모두 9,000만이나 되는 의약비를 썼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위자부는 이미 황후가 되었다. 이 이전에 위장군(衛長君)이 죽었으므로 위청이 장군(將軍)이 되었다. 그는 호족(胡족族)을 물리친 공적이 있어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위청의 아들 중 세 명은 아직 강보(襁褓)에 있었는데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른바 위황후의 언니는 위소아(衛少兒)를 말한다. 소아(少兒)는 아들 곽거병(藿去病)을 낳았다. 그는 군공(軍功)이 있음으로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져 표기장군(驃騎將軍)이라고 불렸으며, 위청은 대장군(大將軍)으로 불렸다. 위황후의 아들 거(據)는 태자로 세워졌다. 위씨(衛氏) 종족은 군공으로 집안이 일어나 다섯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위황후의 얼굴이 노쇠해지자 조(趙)나라 왕부인(王夫人)이 총애를 받았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이부인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오빠 이연년(李延年)은 음률에 정통함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협률(協律)이 되었다. 협률이라는 관직은 과거에는 예인(藝人)이었다. 그들 형제는 모두 음란함을 범한 후 궁죄(宮罪)로 다스려져 멸족을 당하였다. 이때에 마침 그의 맏형 이광리(李廣利)는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대완(大宛)을 토벌하러 갔으므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가 돌아왔으나 무제는 이미 이씨를 멸족시켰으며, 후에 그의 일가를 가련히 여겨 그를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다른 희비(姬妃)가 낳은 두 명의 아들은 연왕(燕王), 광릉왕(廣陵王)에 봉해졌다. 그들의 모친은 총애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죽었다.

이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윤첩여(尹婕妤)의 무리가 계속하여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노래하는 예인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사람들로서, 왕후가 봉지를 소유한 집안의 규수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서 황상지존(皇上至尊)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었다.

저선생(褚先生)은 말하였다.

'내가 낭(郎)이었을 때 일찍이 한가(漢家)의 고사(故事)를 모두 알고 있는 종리생(鍾離生)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말하였다. 왕태후(王太后)는 입궁하기 전 민간에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김왕손(金王孫)이었다. 왕손은 이미 죽었고, 경제(景帝)가 서거한 후 무제(武帝)가 황위를 계승하였으며, 왕태후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한왕손(韓王孫)의 이름은 언(嫣)으로 평소에 무제(武帝)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기회를 타서 태후에게 장릉(長陵)에 딸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무제는 '어째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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