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거병 묘

 

B. C. 200년 한 고조(漢高祖) 유방은 기세등등하게 흉노를 공격하였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항우(項羽)도 끝내 이겼는데 그깟 북쪽 오랑캐쯤이야.. 유방은  32만 대군을 이끌고 평성(平城)으로 향했다.

 

 

흉노의 선우는 당대 최강의 용병술을 자랑하는 묵돌(冒頓) 선우(單于)였다. 묵돌 선우 때 흉노의 판도는 엄청 넓어졌다.  대월지(大月氏), 동호(東胡), 백양(白羊) 등, 지금의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이 바로 흉노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 고대 아시아 중에서 가장 강했던 세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묵돌 선우는 한나라 군을 보자 짐짓 패한 척 후퇴하면서 유인했다. 유방은 거짓퇴각을 간파하지 못한 채 백등산(白登山)까지 곧바로 흉노 군을 추격했다.

 

유방을 기다리던 건 40만대군의 어마어마한 흉노 기병이었다. 묵돌 선우는 기병을 이끌고 백등산에서 한나라 군을 완전 포위했다. 유방은 단순히 포위당한 게 아니었다. 식량이 끊겨 아주 말라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포위당한 지 7일째. 유방을 따라 종군한 당대의 책사 진평(陳平)이 겨우 계책을 하나 냈다. 묵돌 선우의 애첩인 연지(閼氏)에게 몰래 뇌물을 바쳐 묵돌 선우로 하여금 포위를 풀게 하는 방법이었다.

 

 

연지는 진평이 몰래 보낸 뇌물을 받고 묵돌 선우에게 무리하게 한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좋게 좋게 지내자고 하였다. 애첩의 말을 들은 묵돌 선우는 포위를 느슨하게 해주었다. 마침 안개도 끼니 유방은 몰래 백등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죽다 살아 나온 것이다.

 

 

그랬다. 이는 작게는 한나라의 굴욕이요, 크게는 한족의 굴욕이었다. 흉노의 막강한 무력은 항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날고 긴다는 책사 진평도 위기에서 빠져 나올 계책을 낸다는 게 겨우 뇌물을 먹이는 것일 정도로 한나라는 비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흉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유방이 살아 돌아온 지 2년 뒤인 B. C. 198년, 유방은 흉노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차라리 화친을 택했다. 자신의 딸을 묵돌 선우에게 시집 보냈고, 20여 년 뒤인 B. C. 174년, 한 문제(漢文帝) 유항(劉恒)도 노상(老上) 선우에게 공주를 시집보냈다.

 

 

하지만 흉노는 이따금 한나라 국경을 자주 넘어왔다. 한나라가 사신을 보내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유항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한나라가 반격을 하면 흉노는 더욱 한나라를 압박했다. 한나라는 말 그대로 호구였다.

 

 

언제까지 당하고 살 것인가? B. C. 134년. 한 문제 유항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한 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은 복수심이 끓었다. 그는 즉위 후 이듬해인 B. C. 133년. 흉노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고는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賢)의 호족이었던 섭일(聶壹)이 죄를 지어 흉노에 투항한 것처럼 꾸미고 흉노 군이 마읍현까지 오도록 만들었다.

흉노 군이 섭일의 안내를 받으며 남하하였을 때, 흉노 군사들은 가축이 마읍현 부근에 풀어져 있지만 가축을 이끄는 목동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근처 사람들을 잡아 심문하여 주변에 한나라 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서둘러 후퇴했다.

왕회(王恢)가 이끄는 한나라 군이 서둘러 추격했지만 끝내 흉노 군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나라와 흉노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한 무제 유철은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동맹세력을 만드는 한편, 흉노를 토벌할 장수를 발탁하였다. 그 장수가 바로  위청(衛靑)이다.

위청의 누나인 위자부(衛子夫)는 본래 유철의 누나인 평양공주(平陽公主)의 시종이었다. 유철이 평양공주의 집에 갔다가 위자부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궐로 불러 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위청은 이렇게 한나라의 외척이 되어 서서히 조정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B. C. 124년 유철은 위청을 거기장군으로 삼고 3만의 기병을 주어 소건(蘇建), 이저(李沮), 공손하(公孫夏), 이채(李蔡) 등의 장수와 그들이 이끄는 병력을 합쳐 도합 10만 대군으로 삭방군에 침공한 흉노 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렇게 한나라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흉노의 우현왕은 한나라 군을 얕잡아 보고 있었는데 위청이 엄청난 기동력으로 우현왕을 포위하자 우현왕은 당황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이 싸움에서 흉노 군 5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첫 싸움에서 자신감을 얻은 유철은 계속해서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B. C. 124년부터  ​B. C. 123년까지 위청은 수 차례 흉노 군과 싸우며 점차 한나라를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B. C. 123년부터 위청 밑에 있던 한 소년 장수가 점차 그 존재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바로 곽거병(霍去病)이었다.

곽거병은 하동군(河東郡) 평양현(平陽縣) 사람이다. 부친 곽중유(霍仲孺)는 평양공주 집에서 일하는 관리였고, 모친 위소아(衛少兒)는 위청의 누나였다. 즉, 위청의 조카인 셈이다. 유년시절, 그는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했지만 글을 읽고 무예를 익힌 뒤 16세에 위청 수하로 들어갔다.

 

18세에는 유철의 특별한 총애로 시중에 임명되었고  B.C. 123년에 처음 위청을 따라 전장에 나서게 되었다. 

 

위청은 곽거병에게 정예기병 800명을 준 뒤 흉노 군을 공격하게 했다. 곽거병은 기마술과 궁술이 매우 뛰어났다. 그는 흉노 군과 싸우면서 포위당했지만 전혀 기죽지 않고 흉노 군을 혼란에 빠뜨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처음으로 거둔 전공은 흉노 군 수급 2천이었다.

 

유철도 그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

 

 

"표요교위(剽姚校尉) 곽거병이 적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2028명인데 그 안에는 흉노의 상국과 당호도 있었다. 선우의 대부항(大父行), 적약후(籍若侯) 산(産)을 베고, 선우의 계부인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았다. 그의 공은 두 차례나 전군에서 으뜸이었다. 곽거병의 식읍을 1600호로 하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하노라. 상곡태수 학현(郝賢도 네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적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수가 2000여 명이니 식읍을 1100호로 하고 중리후 (衆利侯)에 봉하겠다(剽姚校尉去病斬首虜二千二十八級, 及相國, 當戶, 斬單于大父行籍若侯產, 生捕季父羅姑比, 再冠軍, 以千六百戶封去病為冠軍侯. 上谷太守郝賢四從大將軍, 捕斬 首虜二千餘人, 以千一百戶封賢為利侯)."

 

 

반격을 개시한 이래 한나라가 흉노를 이기는 듯했지만 흉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장군(右將軍) 소건은 병사가 거의 전멸당할 정도로 흉노 군에 대패했으며 전장군(前將軍) 조신(趙信)은 흉노에 투항하는 등 한나라 군도 패전이 따랐다. 이 때문에 위청도 죄를 청할 정도였다.

 

 

한나라와 흉노는 계속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일대에서 싸워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므로 전세를 바꾸고 다각도로 흉노를 압박하고자 다른 공격루트를 찾기로 했다. 그곳이 바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었다.

 

 

주랑(走廊)은 원래 복도라는 뜻인데, 어느 한 지역으로 통하는 좁은 길목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지도나 역사부도 등을 보면 한나라의 영토가 서북쪽으로 좁게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주랑은 바로 그런 길목 일대이다. 중국 본토에서 요서, 요동으로 오기 위한 길목 역시 일부에서는 '요서회랑'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어쨌든 한나라는 하서주랑을 공격해 흉노의 여러 촌락을 제압하기로 했다. 당초, 흉노는 이 지역을 점령하여 강족(羌族)과 연합한 뒤 한나라의 서북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한나라로서는 서역과의 교역 및 수도 장안의 수비 등, 여러 면에서 하서주랑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을 통하여 흉노의 측면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B. C. 121년. 봄이 되자 유철은 곽거병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한 뒤 1만의 기병을 주어 하서주랑 점령에 나섰다. 곽거병은 신속하게 공격하여 오려산(烏戾山)에서 흉노 군을 격파하고 호노하(狐奴河)를 건너 흉노의 5개 부락을 점령했다. 이어서 6일만에 연지산(燕支山)을 지나 1000리를 행군하여 흉노 군과 싸우고 크게 승리했다. 여기서 흉노 수장인 절란왕(折蘭王), 노호왕(盧胡王) 등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

 

 

여름, 유철이 군사를 둘로 나누어 다시 흉노를 공격하였다. 첫 번째는 곽거병과 공손오 등이 북지군에서 출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장건과 이광(李光)이 우북평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곽거병과 같이 출발한 공손오가 길을 잃어 제 때 도착하지 못하였다. 군사 작전이 잘 실행되지 않자 곽거병은 과감하게 홀로 소월지(小月氏)에 도착해 기련산에서 흉노 군을 공격했다. 여기서 흉노 수장인 추도왕(酋塗王)을 비롯하여 상국, 흉노의 연지, 왕자 등 25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예상 외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었지만 이 때 곽거병의 부대 또한 10분의 3이 전사하는 등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어쨌든 승리하였으므로 유철은 곽거병의 식읍을 5000호로 높여주었다.

 

 

이렇게 과감한 작전을 몇 차례 펼치면서 승리해서였을까. 곽거병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그 위세 또한 커져 대장군 위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아직 그의 나이는 20살도 채 안 되었다.

 

 

겨우 20살도 채 안 된 새파랗게 젊은 장수가 왠만한 노장들보다 훨씬 더 용병술이 뛰어나고 무예도 절륜했으니 유철이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건 당연했다.

 

 

이 쯤 되면 시기하는 자들이 나타나 곽거병을 깎아내리기 바쁘기 마련인데 곽거병은 계속 표기장군으로 있으면서 영화를 누렸다. 유철의 신뢰가 절대적이기도 하고 곽거병이 묵묵히 자신이 맡은 임무에만 충실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해(B. C. 121년), 흉노에서 내분이 일어나 혼야왕(渾邪王) 등이 한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있었다. 혼야왕, 휴도왕(休屠王)은 본래 흉노의 서쪽을 지키고 있었는데 곽거병에게  크게 밀리자 흉노 이치사(伊稚斜) 선우의 노여움을 받아 두려움을 느끼고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했다.

 

 

보고를 받은 곽거병은 군사를 이끌고 가 이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 때 곽거병을 보고 혼야왕의 부하들은 마음을 바꾸어 상당수가 다시 달아났다. 곽거병이 추격하여 8000명의 흉노 군을 베고 혼야왕, 휴도왕을 맞이한 뒤 장안으로 왔다. 혼야왕을 만난 유철은 기뻐했고 그의 병사들을 농서, 북지, 상군, 삭방, 운중 등에 배치하게 한 뒤 그들의 생활습관을 인정하여 서쪽 변경 일대를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하서주랑을 비롯한 서북쪽 일대의 여러 군은 한나라의 영향권 아래로 확실하게 들어왔다. 특히 혼야왕이 투항하면서 흉노의 영토이자 요충지였던 기련산이 한나라의 세력권 안에 들자 흉노는 크게 상심했다.

 

 

혼야왕의 투항에서 볼 수 있듯, 곽거병은 주저없이 진군하여 투항에 반대하는 흉노 군을 물리치고 안전하게 혼야왕을 확보하였다. 결정적으로 흉노가 패한 원인은 바로 곽거병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서주랑을 빼앗긴 흉노는 북쪽으로 물러났고 한나라는 이 일대를 지키기 위해 염택에서 기련산까지 성을 쌓았다. 그리고 B. C.115년, 주천군(酒泉郡)과 무위군(武威郡), 장액군(張掖郡), 돈황군(敦煌郡)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하서4군이다.

 

 

참고로 주천군은 곽거병이 유철에게 하사 받은 술을 병사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 샘에 술을 타서 함께 샘물을 마셨다는 일화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되었다.

 

 

21년 뒤인 B. C. 101년 무렵에 한나라는 곽거병이 확보한 하서주랑에서 더 서쪽으로 나아가 교통로와 역참을 설치하고 지금의 위구르 지역까지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서역의 문물이 한나라로 들어오고 한나라의 문물이 서역에 전파되었다.

 

 

곽거병이 세운 공은 비단길을 개척한 장건의 공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큰 것이었다.

 

 

B. C. 119년, 유철은 1년전에 흉노가 우북평을 공격해오자 이에 대한 반격으로 위청과 곽거병에게 5만의 병사를 주어 한해(瀚海)로 진격하게 했다. 위청은 첫싸움에서 흉노군 1만9천여명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한편 대군으로 나아간 곽거병은 투항한 흉노 장수를 앞세워 사막을 건너 흉노 좌현왕이 이끄는 부대를 격파했다.

 

 

곽거병은 7만여명이  넘는 흉노군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흉노의 전력을 크게 꺾었다. 곽거병은 이후 낭거서산(狼居胥山), 고연산(姑衍山)에 이르렀고 위청은 전안산(顔山)에 이르렀는데 모두 한나라 우북평에서 1천여리에 이르는 거리였다. 즉 흉노 영토 깊숙이 진입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10여 차례를 교전하면서 비록 승리를 거두었으나 한나라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곽거병에게 수 차례 패한 흉노였지만 그래도 그 저력은 아직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흉노를 완전히 멸하지는 못했지만 곽거병 때문에 흉노는 확실히 예전보다 국력이 약해졌다.  유철은 곽거병이 개선하자 조서를 내렸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거느리면서 사로잡은 훈육(葷粥 : 흉노)의 병사들까지 이끌고 군장과 군수물자를 가볍게 하여 큰 사막을 가로질러서 강을 건너 장거(章渠)를 사로잡고 비거기(比車耆)를 주살했으며 되돌아와 좌대장(左大將)을 공격하여 깃발과 북을 빼앗았다. 이후산(離侯山)을 넘고 궁려(弓閭)를 건너 둔두왕(屯頭王), 한왕(韓王) 등 3명,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 83명을 사로잡고 낭거서산에서 제단을 쌓아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고연산에서는 지신에게 제사를 한 뒤 한해(翰海) 부근에 올랐다. 사로잡은 자가 70443명이나 되었고 군사는 10분의 3이 죽었다. 적에게 식량을 빼앗아 얻음으로써 먼 곳까지 나아가서도 군량은 떨어지지 않았으니 표기장군에게 5800호를 더한다 (驃騎將軍去病率師, 躬將所獲葷粥之士, 約輕齎, 絕大幕, 涉獲章渠, 以誅比車耆, 轉擊左大將, 斬獲旗鼓, 歷涉離侯. 濟弓閭, 獲屯頭王, 韓王等三人, 將軍, 相國, 當戶, 都尉八十三人, 封狼居胥山, 禪於姑衍, 登臨翰海. 執鹵獲醜七萬有四百四十三級, 師率減什三, 取食於敵, 逴行殊遠而糧不絕, 以五千八百戶益封驃騎將軍)."

여담이지만 옛날에 군 생활을 할 때 우리 부대 부대대장님이 말씀하시던 게 생각난다. "진짜 군인은 적의 식량을 빼앗아 먹으며 싸운다"라고...

적의 식량을 빼앗아 먹으면서 싸웠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칭기즈 칸이다. 지금 유철의 조서를 보면 곽거병 역시 흉노와 싸우면서 식량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던 모양이다. 전쟁에서 식량은 필수요소이다. 식량 보급이 끊기면 그건 사실상 진 싸움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패한 원인도 바로 이순신이 바다를 장악하면서 일본 본토로 연결되는 보급로를 끊었기 때문이고, 촉나라 제갈량이 패전한 원인도 바로 식량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곽거병은 확실히 걸출한 무장이었음엔 분명하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인 흉노 적진 속에서 식량을 확보하고 더 깊숙이 들어가 싸웠다는 건 정말 대단한 무공이라 하겠다. ​

 

 

곽거병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임기응변을 잘 썼는데 이는 유철과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유철이 하루는 병법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는데 곽거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 병법을 익힐 것 까지는 없습니다(顧方略何如耳, 不至學古兵法)."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그는 본래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즐겨 읽었다. 이론에만 연연하지 않고 실전에서 여러 방법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곽거병은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또한 유철이 그에게 집과 땅을 하사하자

 

 

"흉노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 집은 소용없습니다(匈奴未滅無以家為也)."

 

 

라고 말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훗날 조운(趙雲)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유비가 주는 집과 재물을 받지 않았다는 일화에서 보이듯, 곽거병의 이 말은 공(公)을 사(私)보다 더 중시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곽거병은 검소한 성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기』 「위장군 표기열전」에도 곽거병이 재물에 있어서만큼은 인색했다는 뉘앙스의 글을 남기고 있다.

 

 

사마천이 위청과 곽거병의 열전을 같이 지으면서 이 둘의 공적을 칭찬함과 동시 곳곳에서 보이는 그들의 지나친 귀족적인 면모와 그 허물을 비판한 것이라 추측된다.

 

 

참고로 곽거병의 아우가 바로 그 유명한 전한의 막강한 권신이었던 곽광(霍光)이다. 곽광은 전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향력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그는 한 소제(漢昭帝) 유불릉(劉弗陵)과 한 선제(漢 宣帝) 유순(劉詢)을 섬기면서 사실상 황제의 스승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황제를 넘보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곽광이 죽자 곽씨 집안은 빠른 속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곽거병은 24세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짧고 굵게 살다간 당대의 명장이라 평할 수 있겠다. 한나라로서는 개국시조인 유방으로부터 줄줄이 굴욕을 당해오던 나날을 영광의 나날로 바꾸게 한 매우 소중한 명장이며, 흉노로서는 연이어 패배를 안겨 준 잊지 못할 인물로 각인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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