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의 여인들

 

역사상 진황한무(秦皇漢武/진나라는 시황제, 한나라는 무제)로 잘 알려져 있는 한 무제는 재위 54년간(이는 청나라의 강희,건륭을 제외하고는 가장 재위년이 길다)그의 업적에 비하여 수많은 여인과의 이야기거리를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이에 여기서는 무제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그의 일생을 반추해보고자 한다.
무제는 경제의 9번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이다. 효경황후 또한 흥미로운 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황제의 부인이 되기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전력이 있는 여자였다.


 효경황후의 부친은 공후 왕중(共侯 王仲)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연왕 장도(藏茶/유방의 공신숙청으로 몰락한 왕)의 손녀였던 장아(藏兒/후에 平原君으로 존칭됨)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는데, 왕중은 곧 죽어버렸다. 이 후 장아는 다시 전씨(田氏)와 재혼하여 후에 승상이 된 무안후 전분(武安侯 田粉)을 낳았다. 즉, 효경황후와 전분은 이부동모형제인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는 아직까지 유교관념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시기라 여자들의 재혼 또한 자유로웠었다.


장아는 왕중과의 큰 딸을 김왕손(金王孫)이라는 자에게 시집을 보내었는데, 왕씨[효경황후]는 김왕손과의 사이에서 딸을 한 명 낳았다. 어느날, 장아가 지나가는 점쟁이와 마주쳤는데, 그 점쟁이가 말하길 "당신의 큰 딸은 후에 귀하게 될 몸이 반드시 개가(改嫁-재혼)시켜야 하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장아는 사위였던 김왕손에게 가서 자신의 딸과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김왕손은 듣지 않았다. 이에 장아는 강제로 자신의 딸을 납치해서 장안에 있는 황태자[당시의 경제]의 시녀로 들여보냈다. 이에, 왕씨는 황태자의 첩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개척하게 된다.

황태자가 즉위하여 경제가 되었는데, 경제의 첫부인은 박씨(薄氏)였다. 박황후는 경제의 할머니였던 효문태후 박씨(孝文太后 薄氏- 고조 유방의 첩)의 친정집 사람이었는데, 아기가 없다는 이유로 효문태후가 죽자 곧 폐위시켜 버렸다. 당시 경제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던 여인은 율희(栗姬)라는 여인이었는데, 아주 자존심이 세고 질투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마침 율희의 아들 영(榮)이 황제의 장남이었으므로 영(榮)을 황태자에 책봉하였다.

그런 경제에게는 남동생 한명과 누나 한 명이 있었는데, 남동생은 양효왕 무(梁孝王 武)이고, 누나는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였다. 관도장공주는 당읍후 진오(堂邑侯 陳午)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고 있었는데, 이름이 아교(阿嬌)라 하였다. 관도장공주는 마침 비어있는 황태자비를 자신의 딸에게 주려고 했으며, 그로 인하여 자신의 권세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관도장공주는 황태자의 생모인 율희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딸인 아교와 황태자 영을 혼인시키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했던 율희는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 관도장공주가 많은 여인들을 경제의 후궁으로 보내어서 황제가 관도장공주가 소개시켜 준 여인들과 밤을 보낸다고 투덜대던 율희였으니 관도장공주가 좋게 보일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의 자리는 확실하게 떼놓은 당상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관도장공주는 율희의 거절에 분노하였고, 계략을 써서 율희를 몰락시키고 했다. 마침,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장아의 딸 왕미인(王美人-이미 美人에 책봉되었다)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교동왕 철(膠東王 徹 - 후일의 무제)을 관도장공주에 소개시켜준다. 이에 그 유명한 금옥장교(金玉藏嬌)의 고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고사를 대략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연회에서 경제의 누나이자 무제의 고모인 관도장공주가 교동왕 철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아내를 맞아들이고 싶지 않느냐?"
교동왕 철이 말했다.
"저도 맞아들이고 싶어요."
관도장공주가 좌우에 늘어선 궁녀들을 가리켰지만, 유철은 모두 싫다고 하였다. 관도장공주가 끝에 서있는 궁녀를 가리키며 유철에게 다시 물었다.
"저기 있는 아교(阿嬌)는 어떻니?"
교동왕 철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좋아요. 아교가 나의 아내가 된다면, 마땅히 금으로 만든 집에다 그녀를 모셔놓을 것입니다(好. 若得阿嬌作婦, 當作金屋貯之也)."

관도장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경제에게 이들의 혼인을 윤허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얼마 후, 경제의 허락으로 유철과 아교는 부부가 되었다.
즉, 금옥장교(金玉藏嬌)라는 고사는 훌륭한 집에 미인을 감춰둔다는 말이 되겠다.(약간 이야기가 빗나갔네요..)

어쨌든, 교동왕과 아교는 결혼에 성공했고, 관도장공주와 왕미인은 교동왕을 황태자로 옹립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면, 자신들의 아들딸들이 후일의 황제와 황후가 될 것이므로...이 후 관도장공주는 뻔질나게 황궁을 드나들면서 동생이었던 경제에게 율희와 황태자 영의 좋지않은 점을 고자질하고 모함하였다. 게다가 모친이었던 두태후(竇太后)까지 구슬려서 황태자 폐위에 동참을 하니, 경제는 이에 율희와 황태자를 마침내 의심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날, 경제가 병석에 누웠을 때 율희가 간호를 맡게 되었다. 이에 경제는 율희의 마음을 떠보고자 율희에게 부탁을 하나 하였다.
"짐이 만약 죽거든, 당신이 낳은 황태자 못지 않게 다른 황자들도 사랑해 줄 수 있겠소?"
이에, 율희가 매몰차게 말하길,
"저하고 그 아이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습니다"

이에, 경제는 율희에게 크게 실망하였고, 안 그래도 율희의 성가신 성격에 못마땅하던 터이라, 얼마 있지 않아 황태자 영(榮)을 폐위시켜 버렸다. 이에 절망한 율희는 관도공주에게 사정해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자신의 과욕 때문에 아들의 인생까지 망쳐 놓은데 대한 자괴심으로 곧 죽어버렸다.

황태자가 폐위되자, 관도장공주와 왕미인의 뜻대로 교동왕 철이 황태자가 되었고 관도장공주의 딸인 진아교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덩달아 황태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왕미인 또한 비어있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일의 성사에는 관도장공주의 역할이 매우 컷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죽고, 마침내 황태자 철이 즉위하여 무제가 되었다. 아교는 마침내 황후가 되었고, 관도장공주는 황제의 장모이자 고모로써 그 위세와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결혼 6년이 넘어가도록 황후 진아교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금옥장교"라 떠벌리며 첫사랑이었던 아교를 그토록 끔찍히 사랑했던 무제도 점차 아교와의 사랑이 식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근친혼때문에 아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무제와 진아교는 고종사촌간이다.)

어쨌든, 무제의 사랑이 식어가는데는 아교의 성질도 한 몫했는데, 모친이었던 관도장공주를 닮아 성격이 거만했고, 질투심이 많아 무제가 바람(?)을 피는 꼴을 보지 못하였고, 시시콜콜 황제에게 간섭하는 성격이었다. 쉽게 말하면 황제를 너무나 사랑해서 한 시라도 황제가 옆에 있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했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황후에게 질려버린 무제는 슬슬 바람기가 발동하게 되는데

무제에게는 친누나였던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있었다. 어느날, 평양공주 집으로 놀러간 황제는 평양공주가 베푼 연회에서 아리따운 여자가수 위자부(衛子夫)라는 노비를 만나게 된다.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몸종으로써 그녀의 어머니 위온(衛溫)때부터 평양공주의 남편 조수(曺守)의 노비였는데, 위자부의 신분도 그러므로 아주 미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위자부를 보고 무제는 한 눈에 반하여 평양공주 집의 화장실에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당시의 화장실을 오늘날과 같이 그냥 일만 보는 곳이 아니라 온갖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고 함!!) 이런 관계를 눈치챈 평양공주는 무제에게 위자부를 주었으며,위자부는 무제의 후궁이 되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황후 진아교는 눈이 뒤집어져서(?) 무제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위자부를 못살게 구는 등 아주 황후로써의 체통을 잃어버린 짓을 많이 했죠.

그러나, 황후 진아교와 관도장공주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즉, 무제는 아교와 결혼했기에 황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교가 만약 경제의 다른 아들들과 결혼했다면 그 사람이 황제가 되었겠죠..)꾹 참고 있었는데,,마침내 황후 진아교는 위자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리고 위자부가 기거하는 궁에 요사스런 물건을 파뭍는 등 무고(巫蠱)를 했다.

그러나 이런 짓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발각이 되고 이에 분노한 무제는 황후 진아교를 폐위시켜 버리고 장문궁(長門宮)에 유폐를 시켜버렸다. 이것이 곧 제 1차 무고의 화[巫蠱禍]이다. 이 후 진아교는 황제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당시 잘 나가는 가수(?? -- 사실은 시인입니다만,,)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부탁해 자신의 처지를 황제에게 호소하는 장문부(長門賦)라는 노래를 만들게 해서 유행을 시키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허사가 된 채 끝내 무제는 그녀를 찾지 않았고 진아교는 결국 미쳐 정신병을 앓다가 죽어버렸다.

그럼, 위자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아교가 폐위되자, 무제는 위자부를 황후로 삼았다. 명문귀족들만 될 수 있었던 황후 자리에 천한 신분의 위자부를 앉힌 것이다, 한 마디로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라 하겠다. 이후 위자부의 시호는 효무황후(孝武皇后)인데, 곧이어 무제의 장남 여태자 거(戾太子 據)를 낳고, 곧이어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제읍공주(諸邑公主)를 출산했다. 이후 황태자를 출산한 공로로 그녀는 황후자라를 40년 동안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오빠였던 위청(衛靑)은 흉노를 토벌한 공로로 여러차례 공신에 책봉되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고, 미망인이 된 평양공주와 결혼하여, 무제와는 겹사돈까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즉, 위자부 남매과 무제남매가 겹쳐가며 결혼한 셈이죠..) 위자부의 언니인 위군유(衛君儒)는 승상 공손하(公孫賀)와 결혼까지 했으며, 조카였던 곽거병(藿去病 - 위자부의 또다른 언니 위소아의 아들) 역시 위청과 함께 젊은 나이에 흉노토벌에 큰 공을 세워 무제의 신임이 대단했다. 곽거병의 동생 곽광(藿光)역시 무제가 죽은 뒤 사실상의 한의 실권자로써 무제의 어린 아들 소제(昭帝)를 보필한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아리따웠던 위자부도 늙기 시작하니깐, 주책없이 무제는 또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그 첫번째 상대가 제회왕 굉(齊懷王 宏)을 낳은 왕부인(王夫人)이었고, 두번째가 연자왕(燕刺王 旦)을 낳은 이희(李姬)였다. 그 다음에 그 유명한 경국지색 이부인(李夫人)이 등장하는데, 이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많다. 여기에도 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가 끼어있었다.애초 자기집의 여가수였던 위황후를 천거한 것도 평양공주이다.

전속 악단을 거느렸던 평양공주는 악단원 중에 재색겸비하고 가무에 능한 자가 있으면 그를 궁전에 청했다. 이연년(李蓮年)이라하는 작곡가도 평양공주의 천거로 궁정에 입궁했다.그는 단조롭던 궁중의 음악을 특이하게 바꾸어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즉,음악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위황후의 얼굴도 일그러지자 무제는 후궁에서 미인을 구했지만 이거다하고 마음이 내키는 미인은 없었다. 무제의 중얼거림을 듣고 평양공주는 이연년의 누이동생을 추천하였다, 그녀가 바로 이부인이다.

이부인은 부름을 받았고,황제는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이부인은 맑고 귀여운 미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아들을 낳은 후 병이 들었다. 이부인의 임종 때 무제가 찾아간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부인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창읍왕(이부인이 낳은 아들)과 그녀의 형제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할 뿐이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제는 사랑하는 이부인의 얼굴을 단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팠다. 그러나 이부인은 아무리 해도 얼굴을 내놓지 않았다.

"부인은 얼굴에 화장하지 않고서는 군부(君夫)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랜 병고로 소첩은 화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불을 점점 더 깊숙히 뒤집어 쓰는 이유였다. 무제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이부인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무제는 기분 나쁘게 병실을 나가버렸다. 그 뒤 이부인의 여자친척들은 그녀에게 원망스러운 말만 했다.

후궁에는 황제외의 남자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이부인의 자녀와 형제들의 아내들 뿐이었다.
"잠깐 얼굴을 보여주고 친척들의 일을 부탁해도 좋았을 터인데 황제께서는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에요."
이부인은 완전히 쇠진해 있었지만, 젖먹던 힘을 다해 말을 했다.

"친척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폐하에게 이 얼굴을 보이지 않은 거예요.

나는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만으로 천한 신분으로 폐하께 사랑을 받았어요.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랑을 받던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없으면 사랑도 사라지는 법이에요.

폐하께서 그처럼 열심히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옛날의 나의 얼굴이에요.

나는 지금 병으로 이처럼 보기싫은 얼굴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요.

이 얼굴을 보셨다면 폐하께서는 분명히 기분이 상해버리셔서 형제들을 돌봐줄 마음이 없어지실 거예요."

이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모여 있던 여자들은 통곡했다. 이부인이 죽자 무제는 그녀를 좋은 곳에 장사지냈다.

이런 이부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부인의 오빠였던 이연년(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름을 이광리[李廣利]로 고쳤다)은 나중에 무제의 명에 의해 죽게 된다.

이 이광리는 자신이 가수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누이동생이었던 이부인의 위세만 믿고 장군까지 되어 온갖 위세를 다 부리다가 흉노전쟁에서 참패하였는데,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니 무제는 이부인의 체면도 있고 해서 이광리를 감싸주었고, 대신 이광리의 작전 실패로 흉노의 포로가 된 이릉(李陵)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에 저 유명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宮刑)을 받아 고자(?)가 된 것은 또 유명한 이야기이다.

어쨌든, 이부인도 죽었는데 또 무제의 집안이 조용할 일이 있을까? 이번의 문제는 황후 위자부의 아들인 황태자 거(據)에게서 튀어나왔다. 애당초 황태자 거는 무제의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과는 달리 유순하고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이러한 황태자를 무제는 자신과 닮지 않았다 하여 썩 좋아하고 있지 않았다. 마침 승상인 공손하(위자부의 형부)는 무제와의 정책대립으로 위기에 빠져있었는데, 주안세(周安世)라는 대도둑을 검거함으로써 그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다.

마침내 주안세를 검거하기는 했는데, 그만 주안세라는 놈이 국문장에서 무제에게 양석공주(위자부의 딸)와 공손경성(公孫慶聲-공손하의 아들)이 서로 불륜관계라고 폭로해버렸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양석공주와 제읍공주, 위청의 아들이었던 위항(衛抗), 공손하와 공손경성 부자가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권력투쟁에서 황후 위자부와 태자 거의 보호막이 되어줄 방패가 모두 제거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때 때마침, 무제의 지금거리에서 모시는 강충(江充)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강충은 아주 사소한 일로 황태자와 틀어지게 되었다. 그 사소한 일이란 황태자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황제의 사신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를 고자질한 강충은 무제로 부터 관리들의 감찰을 잘 한다고 큰 상을 받았으며, 황태자의 스승은 코가 잘리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황태자는 강충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무제는 70이 넘은 노인이고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에 불안해진 강충은 황태자를 제거할 모략을 꾸미게 되었다.

그는 우선 무제가 다니는 길과 침소에 저주가 쓰여진 물건과 인형을 마구 파묻고 이를 황태자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버렸다. 이런 강충의 행동에 분개한 황태자는 먼저 선수를 쳐서 강충을 죽여버리고 군사를 일으킨다.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 무제는 명령을 내려 황태자의 군사를 진압하도록 명령하고 황태자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위자부 또한 자결을 명함으로써 화려했던 위자부의 생애도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곧이어, 황태자의 두 아들도 죽여버리고 젖먹이 손자만 살아남는데, 그가 곧 나중에 황제가 되는 선제(宣帝)이다. 이후, 강충의 모함으로 황태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무제는 위자부와 황태자를 복권시켜준다. 이것이 제 2차 무고의 화[巫蠱禍]의 전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무제의 사랑 구익부인 조첩여(鉤翊夫人 趙捷予)를 살펴볼까 한다. 조첩여는 무제를 위한 여인이라고 할까?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는데 주위사람들이 아무리 손을 펴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제와 와서 손을 펴주니 손이 펴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있다.

어쨌든 그녀는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불릉(弗陵 - 후일의 소제)이라는 아이까지 두었는데, 무제는 불릉이 요임금과 같이 13개월만에 낳아다 하여 매우 총애하였으며 불릉이 항상 자신을 닮았다 하여 좋아하였다.

무제가 드디어 병석에 눕게 되고 죽음이 가까워오자, 불릉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불릉이 8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그 어머니인 조첩여가 뒤에서 정사에 간여할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불릉은 황제로 세우되 그 어머니인 조첩여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아들은 부귀를 누리는 황제가 될 것이나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첩여는 무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무제는 냉혹하였다. 결국 조첩여는 죽었고, 무제도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남기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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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정리해 보면(후궁)

 

1. 폐황후 진아교

 

2. 효무황후 위자부

 

3. 왕부인

 

4. 이희

 

5. 이부인

 

6. 구익부인 조첩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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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

 

1. 여태자 거 - 효무황후生

 

2. 제회왕 굉 - 왕부인生

 

3. 연자왕  - 이희生

 

4. 창읍황 -이부인生

 

5. 소제 - 구익부인 조첩여生

 

6. 양석공주 - 효무황후生

 

7. 제읍공주 - 효무황후生

 

 

한무제 유철의 딜레마.. 고모와 할머니 등쌀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위 그림에서 가운데 저 분으로 인해 유철이 황태자로 봉해지고 16세에 한무제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저 분이 누구냐 하면 유철의 아버지 한경제 유계의 누이 관도(館陶) 장공주(長公主) 황녀(皇女)로 유철에게는 고모가 되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분이 ㅎㄷㄷ 하다. 우선은, 역사가 그러하듯 아비 부황이 어느정도 기반을 마련하면 태자를 책봉하게 되어 있는데.. 이때 경제 유계는 태자 책봉을 율비(맨 우측)의 소생 유영으로 황태자를 삼게 된다. 그러면서 젊고 싱싱한 율비는 안하무인격..

그런 와중에 장공주가 자신의 딸 유교를 유영과 맺을려는 제의에 율비는 청을 매정하게 거절했고 이에 장공주는 율비에게 자존심의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이때 유영의 태부 두영이 율비에게 큰 잘못을 했다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다. 이에 장공주는 동생 경제에게 율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면서 황태자를 다시 옹립할 것을 진언드리고.. 그 결과 장공주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새롭게 황태자로 옹립된 인물이 당시 나이 일곱의 유철이다. 이렇게 무제는 고모인 관도 장공주의 조력에 힘입어 훗날 '대한황제(大漢皇帝)'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어린 유철을 황태자로 앉힌 장공주는 자신의 딸 유교를 왕황후(맨 좌측)의 소생 유철에게 보내 맺게하니 그가 바로 정실황후 진황후가 된다. 그런데 어린시절 둘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어느날 어린 유철이 고모인 황녀 어전에 놀러갔다가 장공주는 어린 조카 유철에게 "철아 장가가고 싶니? 응 장가가고 싶어.. " 어린넘이 벌써부터 밝혔단다. 그러더니 시녀들을 불러놓고 누가 좋은지 어디 한번 골라보라 했는데.. 시녀는 안고르고 유교를 고르며 하는말.. "만일 내 색시로 교를 맞이할 수 있다면, 금옥(황금)으로 집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살게끔 해주겠어요.." 이 이야기는 활달하고 호사스러우며 호색적인 무제의 성격을 나타나는 고사로 여기서 금옥(金屋)이란 화려하게 잘 만든 집이라는 의미이며, 훌륭한 집에 미인을 감춰둔다는 '금옥장교(金玉藏嬌)'의 고사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암튼, 고모의 도움으로 황태자에서 황제까지 오른 그는 나이가 아직 십대 16세였다. 특히 고모인 장공주는 상당한 여걸이었는데.. 당시 한나라 시대의 황녀는 대체로 어머마마한 권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도리어 지방의 제후왕으로 봉해져 수도 장안에서 멀어져간 황자들보다도 권력이 컸으니.. 그것은 바로 수도 장안에 거주하며 중앙 정치에 관여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권위 있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미 책봉된 황태자를 갈아 치우기까지 한 장공주는 아니 유철의 장모는 자신의 딸 진황후와 가까이 지내며 계속 한무제 유철에게 사사건건 괴롭히며 개입하는데.. 그 괴롭힘은 진황후가 소생이 없고 유철이 다른 후실을 들이면서부터이다. 암튼, 이런 황후와 황후 모친의 배후에는 훨씬 더 큰 또 하나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으니.. 바로 무제 유철의 할머니 두태후(아래 그림) 되시겠다.

우선, 이분은 아집이 대단하다. 아들 경제 유계가 제후국들 견제로 삭번책 쓸때도 안된다고 작렬하시고.. 그것을 제안한 조착을 참수하라 지시하고.. 다음 황태자는 니 동생 양왕 유무에게 물려주라 신공 날리고.. 제후국들 반란 오초칠국의 난(B.C.154년)이 평정되고 나서도 논공행상에서 아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등.. 그냥 뒷방 어머니로 물러나 있지 않는다. 그녀의 내력은 이렇다. 두태후는 원래 한고조 유방의 황후 여태후의 시녀출신이었는데.. 당시 시녀들이 제후국에 팔려나갈때 잘못된 교지로 대왕(代王) 유앙(劉恒)에게 보내지게 된다. 하지만 그 유앙이 황제에 오르니 한문제(漢文帝)로 그녀는 일약 황후자리게 오르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장자 유계가 한경제에 오르면서 그녀는 계속 아들을 괴롭힌다. 암튼, 이 분은 잔소리가 극도로 심한 스타일이었다는데..

 



그 괴롭힘은 아들 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손자인 무제가 그 뒤를 이으면서 이 여인은 태황태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손자가 하는 일미 미덥지 못해 견딜 수가 없어 잔소리를 해대며 정치에 간섭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학과의 충돌이다. 즉 이 할머니 눈에는 공자가 주창한 유교는 한낱 거짓 부렁쟁이들의 말장난이자 이상만 좇는다 해서 유학을 영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대신 두태후는 공자와 동시대인 노자의 학설을 따랐다. 즉, 현실을 중시하고 나아가서는 권모술수마저도 중시하는 경향을 띤 노자의 이른바 술(術)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아들 경제에게도 노자를 읽게 하였다는데..

그런데, 이 어린넘의 황제가 유학을 숭상하며 유자들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조정으로 초빙해 야단법석을 떠니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각 유자들을 대충 초빙하는 것이 아니라 안거포륜(安車蒲輪, 바퀴를 부들 풀로 싸서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수레라는 뜻으로 현사를 우대한다는 뜻으로 쓰인다.)에 태워 극진히 맞이했다고 하니.. 할머니 눈에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셈.. 그저 어둡고 어수룩한 인텔리에 완고한 고집불통에다 벽창호들에 시건방지기가 그지없는 자들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고조 시절 옆에서 지켜보며 조참 승상이 거드림없이 술을 즐긴 모습에서 노자의 이른바 '무위(無爲)의 도(道)'를 그리워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린 황제 유철은 할머니의 끊임없는 잔소리 등살에도 조금이나마 보답겸 할머니의 먼 조카뻘되는 두영을 승상자리에 어머니 왕태후의 동생 전분을 태위직에 두며 탕평책을 썼지만 두 사람다 역시 유학을 애호했고.. 이 두명의 대신은 즉시 유자 두명 어사대부 조관과 낭중령 왕장을 대관에 임명하며 전문적인 유자그룹으로 포진시켜 유교를 주창하는데.. 이때 두태후쪽 황녀들의 반대의 목소리가 커져 이 유자 그룹은 맥없이 실각한다. 하지만 세월앞에 장사없으니.. 꼬장꼬장 하시던 두태후가 유철이 22살 되던 건안 6년에 돌아가시면서 무제의 정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유학을 익힌 문사들을 대거 등용하며 인재 발탁의 시기로 천제(天帝)의 시작 선포와 자신의 문화정책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고모인 황녀 장공주는 여전히 건재했고 장공주의 딸 정실 황후 진황후는 소생이 없어 히스테리는 날로 심해져 갔으니.. 이때 무제는 누이 평양공주로부터 소개받은 가희 출신의 시녀 위자부(衛子夫)를 총애해서 연이어 세명의 황녀을 낳으며 진 황후 일파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러면서 이때 무제는 위자부의 남동생 '위청(衛靑)'이라는 청년을 건장궁 소속 시종무관으로 임명한다. 이 위청이 누구던가.. 수차례에 걸친 흉노 정벌의 지휘관에 오르면서 무제가 통치하는 한 제국의 위력을 북방에 떨친 대장군이 바로 이 사람이다. 암튼, 위자부 총애로 히스테리에 발작을 일으킨 진황후는 장희빈 못지않은 요술을 써서 황제를 저주한다는 소문에 그만 장문궁으로 폐위되고 만다. 그러면서 다시 황제 유철을 오매불망하며 당시 천하제일의 문장가 사마상여를 통해 각운을 붙인 아름다운 문장 '장문부(長門賦)를 짓게 해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황후가 실각해 폐위되어 있는 동안에도 황후의 어머니 관도 장공주 황녀만큼은 50이 넘었는데도 방탕한 불량 마담처럼 제멋대로 놀아나고 있었으니.. 이른바 미소년 동언을 가까이 하며 그 소년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장안의 명사들과 사귀게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동언을 무제에게까지 소개시켜주어 동언은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관도 장공주가 죽은것은 10여년후고 결국 장문궁에 돌아오지 못하고 불우하게 보낸 왕후가 죽은 때는 다시 수년이 더 지난 뒤였다고 전한다.

이것이 무제의 재위 50여년중 제1기로 볼 수 있는 기원전 141부터 130년까지로 연호로 치면 건원에서 원광으로 불리던 연간에 해당하는 역사적 내용들이다. 암튼, 요지는 한무제 유철의 치세 초반에는 고모 장공주와 할머니 두태후의 등쌀이 특히 유학의 국교화 과정에서 꽤 있었다는 이야기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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