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를 통틀어 진한제국으로 부른다. 한나라는 진나라가 만든 통일제국의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으며 진한제국은 중국의 고대를 대표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아직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한나라 초기에는 폭압적인 진의 지배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한 고조는 가혹한 법치를 완화하고 농업생산의 안정을 위한 조처들을 발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정권임을 강조했다.
특히 정권 수립에 큰 공을 세운 건국공신들과 진말한초에 다시 부상한 과거 6국 지역의 지방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른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국제란 군현제와 봉건제가 절충된 것이다.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부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이들을 제후왕으로 봉건하여 제후국 안에서는 정치와 경제 전반을 독자적으로 관리하도록 위임했다. 물론 진나라가 군현제를 통해 너무나 급격하게 중앙집권을 추진했기 때문에 단명에 그쳤다는 고조의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의 제후왕들이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하나하나 제거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인 초왕 한신,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등이 모두 제거되었다.
감쪽같이 고조의 덫에 걸려든 한신은 한탄하여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날랜 사냥개는 삶아 없어지고,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구석에 처박히게 되며, 적국이 패하면 지모 있는 신하는 필요 없게 된다 하더니···."
이른바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이다. 토사구팽이라는 고사는 춘추시대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왕조 초기에 반복되어 나타나곤 한다. 춘추시대의 패자 월왕 구천이 패권을 차지할 때 범려와 문종이 큰 공을 세웠다. 범려는 제나라에 은거한 후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했다. 소하, 장량과 함께 한나라 창업 삼걸로 불리던 한신도 그러한 신세가 된 것이다. 한신은 공로를 인정받아 초왕에 봉해졌는데, 그의 절친이자 항우의 맹장이었던 종리매를 은신시킨 일을 구실로 토사구팽 당했다.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는 않고 세력을 빼앗아 회음후로 좌천시킨 뒤 주거를 도읍 장안으로 제한하였다.
기원전 195년 고조가 그 파란만장한 52년 동안의 생을 마감할 때에는 이미 거의 모든 제후왕들은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다. 유언처럼 '유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불문율이 남겨졌다. 그런데 동성의 제후왕들도 시간이 지나 혈연관계가 소원해짐에 따라 점차 자신의 영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게 됨으로써 중앙권력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군은 15개에 불과하고 제후국은 30여 개에 달했으며, 큰 제후국은 군 5, 6개를 합친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침내 무제의 아버지인 경제 때에 이르러 제후국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경제는 박사인 조조의 의견을 채택하여 제후왕의 과실을 헤아려 영지를 삭감하는 등 제후국의 축소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吳), 초(楚) 등 7개 제후국들이 연합하여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오초 7국의 난'으로 기원전 154년의 일이었다.
오왕 유비는 황실의 원로였지만, 40년간 오나라를 다스리면서 오나라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소금과 구리의 산지를 헌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겹쳐 난을 주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중앙에 입조하러 갔던 그의 아들이 함께 바둑을 두던 중에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절명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제후왕들은 점점 가난해져서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어나서 살 길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유비의 호소에 응해 초, 조 등 중국 동남부의 6국이 가세하여 간신 조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흉노 등 외세와의 동맹도 꾀하고 있었으며, 초반의 전세를 장악하여 한나라는 건국 50년 만에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7국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조가 참수되었으나 반군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리 없었다.
경제의 친동생인 양왕이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자 반격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진압군 총사령관인 주아부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반란군의 어떠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치고 보급로가 차단된 반란군은 점점 굶주림에 쓰러져갔다. 마침내 오왕을 비롯 다른 제후왕들도 모두 살해되니, 반란은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끝으로, 한황실의 중앙권력에 도전할 더 이상의 강력한 지방 세력은 없어진 셈이다.
최종적인 마무리는 역시 한 무제 때 이루어졌다.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하여 제후권의 발호에 마지막 쐐기를 박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권력을 완성했다. 추은령이란 제후왕이 죽은 후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열후로 승격시켜 중앙정부의 관할 하에 있는 군에 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후왕의 영지는 더욱 세분되고 축소되었다. 종묘 제사에 헌상한 황금의 양이 부족하다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가차없이 처벌하는 주금율의 제도도 시행되었다. 군국제는 다시 군현제(郡縣制)로 재편되었고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었다.
한 무제 유철은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기원전 87년 7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장장 54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중국 고대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장식했다. 그것은 아마도 진시황이 꿈꾸었던 세계였을 것이다. 한 무제는 진시황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함으로써 고대 전제군주를 대표하는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무제 때는 오늘날 중국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판도가 형성되었다. 그는 외정에도 힘써 오랜 숙원인 흉노 정벌에 총력을 기울여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며, 베트남을 정복하고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우리나라로서는 최선진국이었던 고조선이 중국에 멸망함으로써 커다란 역사적 손실을 입었다. 후발국가인 고구려 등이 다시 강성해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 오초 7국의 난(기원전 154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3.23,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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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주나라의 봉건제(封建制),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 ¶
진나라 36개 군 |
군현제의 기초적인 모습은 춘추시대때도 존재했지만 제대로 된 형태로 나타난것은 BC 350년의 일로 진(秦) 효공(孝公)때 법가(法家) 사상가인 재상 상앙(商鞅)이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41개의 현으로 정리한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군현제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황제의 명령을 받은 관리들이 임지로 떠나 중앙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에 비해 황제의 의중을 정치에 좀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여섯개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는 이사(李斯)의 계책을 받아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이 군현제를 제대로 시행해 보기도 전에 여러 실책과 악재가 겹치며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2.2. 한(漢)의 군국제(郡國制) ¶
군국제와 군현제를 나타낸 그림. 다만 한나라의 군국제는 왼쪽의 그림에 비해서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부분이 크다. |
항우(項羽)는 거록대전에서 장한을 격파하고 황제 자영을 자결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스스로를 패왕이라 일컫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일단 진나라와 진나라의 제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시기였기도 하고, 항우 입장에선 자기를 따라 싸운 동맹 세력과 수하들에게 보답을 해 줘야 했다. 이리하여 장한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위표를 서위왕으로, 영포를 구강왕으로 임명하는 등 골고루 전부 왕을 시켜주었다.
2.3. BC 177년 제북왕 유흥거(劉興居)의 반란 ¶
2.4. BC 174년 회남왕 유장(劉長)의 반란 ¶
3.2. 가의(賈誼)의 대책 ¶
3.3. 한경제의 즉위와 조조의 대책 ¶
"황제와 제후들은 골육인데 어찌 친척들끼리 골육 상쟁을 벌이게 하려 하느냐?" "오직 그리해야만 천자는 존귀해지고 종묘는 편안해질 것입니다." "유씨는 너로 인해 평안해겠지만, 조씨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나는 죽어버리겠다." 그리고는 독약을 먹고 죽으면서 말했다. "나는 너에게 화가 닥치는것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 사기 원앙조조열전 中 |
조조의 아버지가 죽은 10일 뒤에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다.
4.1. 대 제후왕 유비 ¶
중국 드라마 〈미인심계〉유비 |
조조의 상소문은 수많은 제후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 제후들 중에 가장 막강한 사람이 오나라의 왕 유비 였다.
유방의 친형인 유중의 아들로, 20살의 나이부터 유방을 따라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오왕이 됐으며, 봉지는 무려 3군(郡) 53성(城)에 다다렀다. 거기에 그 후로 40년간 꾸준히 세력을 키워 막강한 힘을 자랑하였다. 거기에 구리 광산을 개발해 동전을 주조하고 염전을 개간해 소금을 생산했고,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부과하지 않아도 재정이 넉넉할 정도로 풍족했다. 또 다른 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주었다.
"고조(유방)께서 천하를 평정했을 시기에는 형제분들이 얼마 되지 않았고 황자들도 어렸기 때문에 커다란 영지를 다만 동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봉했습니다. 그리하여 첩복(妾腹)의 황자 유비(劉肥)[4]에게는 제(齊)의 70여 성을, 배다른 아우 유교에게는 초(楚)의 40여 성을, 다시 유비에게는 오(吳)의 50여 성을 내렸으니 이는 천하의 절반을 준 것입니다." "헌데 지금 저 오왕 유비(劉濞)는 이전에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일로 원한을 품고 병을 핑계 삼아 도무지 입조 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형을 내려야만 마땅한 죄이나 선제(한문제)께서는 인자하시여 너그럽게 용서하시었습니다. 그 은덕은 가히 지극한 것이라 마땅히 오왕은 새 출발을 해야 할 터인데, 더욱 방자해져 화폐를 사사로이 주조하고 바닷물을 멋대로 제염(製鹽)하며,[5] 천하의 도망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6]" "유비의 봉지를 삭감해도 반란을 일어날것이고, 삭감을 하지 않아도 반란은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점은 삭감하면 반란은 빨리 일어나나 피해는 적을 것이고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날 것이나 피해는 막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사기 오왕비열전 中 |
4.2. 초왕 유무에 대한 탄압 ¶
5.1. 동지를 모으는 유비 ¶
"황제께서는 간신들의 손아귀에서 조종되고 있습니다. 감언이설을 일삼는 이들은 제후들의 땅을 불법으로 빼았고 선량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속담에 '쌀겨를 다 털어버리면 쌀을 먹는다'는 것이 있듯이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영지 삭감이 아니라 나라를 몽땅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찌 모반을 하겠소. 폐하의 뜻을 거스릴 수는 없소." "어사대부 조조는 폐하를 미혹하여 충신을 가리고 어진이를 막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를 미워하고 모든 제후들은 그를 증오합니다. 얼마 전에 불길한 징조인 혜성이 나타났고 메뚜기때가 일어났으니 이제 거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왕께서는 안으로 조조를 죽이고 밖으로 대왕의 뒤를 쫓는다면 가는 곳마다 모두 항복할 것이며 복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기십니다." |
이렇게 반란의 기본적인 명분은 '간신 조조 토벌'이었다. 교서왕이 뜻을 저버릴까 두려운 유비는 직접 교서왕을 만나서 맹약을 맺었다. 교서왕의 부하들 중에서는 이를 우려하면서 반란을 말리는 신하들도 있었다. 일이 잘 되지 못하면 망하는 일이고 잘 되더라도 결국 오왕과 더불어 두 왕이 싸우게 될 것이니 하나의 황제를 모시는것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5.2. 7개 나라의 반란 ¶
- 오왕(吳王) 유비(劉濞)
- 초왕(楚王) 유무(劉戊)
- 조왕(趙王) 유수(劉遂)[8]
-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9]
-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闢光)
- 교동왕(膠東王) 유응거(劉熊渠)
5.3. 조정의 대응 ¶
"그대는 오나라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오왕의 대장군인 진녹백이라는 자는 어떤 자요? 그리고 오, 초의 반란은 진압될 수 있겠소?" |
원앙은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오왕에게 붙을리가 없으니 그 수하들은 신경 쓸것이 없음.'이라고 말했고 조조 역시 동의하였다. 경제가 계책을 묻자 원앙은 신하들을 물려줄것을 요청하여 모든 신하들이 나갔으나 조조만이 멀뚱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원앙은 조조 역시 물려주라고 부탁했고 조조는 투덜대며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원앙은 황제에게 말했다.
"반란군의 명분은 조조의 목숨이니, 조조를 죽이면 자연스럽게 해산될 것임." |
황제는 조조를 좋아했기에 머뭇거렸지만 원앙은 이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며 계속 주청을 올렸다. 결국 경제는 그러하기로 하고 원앙을 유비의 조카인 유광과 함께 오나라로 보냈다.
5.4. 주아부의 계책 ¶
반란을 진압한 주아부 |
대군을 이끌고 적을 토벌하러 떠난 주아부는 도중에 낙양에서 극맹(劇孟)을 부하로 삼게 되었다. 극맹을 얻은 것이 기쁜 주아부는 "반란군들이 이미 그대를 포섭한 줄 알았다. 이제 나는 적국 하나를 얻은것과 같다."라며 좋아하였다.
"오나라 군대는 정예병이니 직접 싸우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장군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창읍(昌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보루를 높게 쌓고 버티면서 양나라에 일을 다 맡기십시오. 오나라 군은 분명 정예부대를 총동원해서 양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그 기회에 회사구(淮泗口)를 공격해 오나라의 보급선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적은 지칠대로 지쳤을테니, 온전하고 강한 군대로 일거에 무너뜨리면 됩니다." |
이부분은 사기의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서는 등도위의 계책을 받은것으로 되어있는데, 한서 주아부전에서는 주아부가 직접 한경제에게 이러한 계책을 내놓은 것으로 나온다.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顔師古)는 "두 가지 설이 다른데, 어느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썼다.
"장군께서 동으로 오와 초를 주멸하는데, 승리하면 종묘가 편안해지나, 이기지 못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능히 신의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
그러자 주아부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수레에서 내려와 계책을 물었다. 조섭은 말했다.
"오왕 유비는 부유한데다 죽기를 각오한 용맹한 군사를 모은것이 오래되었습니다. 태위께서 오신다는것을 들었으니 필시 효관과 민지의 막히고 좁은 곳 사이에 매복을 두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여기서부터 조금 서쪽으로 가십시오. 그러한 다음 남전(藍田)으로 내달리고, 무관(武關)을 나와 낙양(雒陽)에 이르시면 그 사이는 늦어도 불과 하루이틀 차이밖에 되지 않는데, 바로 무고(武庫)로 들어가시어 북을 쳐서 울리십시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장군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길로 해서 급작스레 그들 앞에 서야 합니다" - 한서 주아부전 |
주아부는 그 계책을 따랐다. 낙양에 도착해서 효관과 민지 사이를 수색하니 예상대로 복병이 있었다.
5.5. 장수들의 계책을 거부한 유비 ¶
"대군이 한 덩어리로 모여 가더라도 특별한 방법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5만명만 주시면 양자강과 회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회남과 장수를 수중에 넣고, 다시 무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대왕과 합류하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책(奇策)입니다." |
하지만 오나라의 태자는 반대 의견을 내었다.
"왕께서는 반군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데, 어찌 군대를 남에게 빌려주겠습니까. 만약 배신하면 큰 일이 날것입니다. 더구나 병권을 갈라놓는것은 좋지 못합니다." |
오나라의 젊은 장수 환장군(桓將軍)은 또다른 계책을 내었다.
"오나라 군대에는 보병이 많은데 보병은 험난한 지형에서도 싸울 수 있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전차와 기병이 많은데 이들은 평지에서 싸워야만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진격하시며 항복하지 않은 성읍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창고부터 점령하십시오. 그리하면 오창의 양곡을 보급받고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한나라 군대를 막고 뭇 제후들을 호령하신다면, 관중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유비는 자기가 그 계책을 취하지 않을 경우를 물었다. 환장군은 '성읍을 전부 항복시키고 있다가는 한군의 전차와 기마대가 들판에서 아군을 패배시킬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노장군들이 반대하여 환장군의 계책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5.6. 양왕의 분투와 주아부의 역습 ¶
5.7. 주구의 진격 ¶
"제가 무능하여 임명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제가 장군이 되려는것이 아닙니다. 다만 왕께서 가지고 계신 한나라의 절부(節符 : 증명서)를 한장만 주십시오.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
유비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절부를 내어주었고, 주구는 말을 타고 곧바로 하비로 달렸다. 하비에서는 오나라가 모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을 굳게 닫은지 오래였다. 주구는 절부를 사용해 현령을 불러들이고는 곧바로 그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과 토호들을 불러 모은 다음 겁을 주었다.
"오나라의 반란군은 곧 당도할 터인데, 그러하면 이까짓 하비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오." |
그리고 항복하면 살 수 있다고 말하여 하비성을 세치 혀로 함락시키고, 10만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성양까지 진격해서 그곳의 중위를 격파했다. 그런데 유비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탄식하였다.
"내가 저토록 허술한 자와 대사를 논하려 했단 말이냐!" |
그리고는 하비로 돌아가다가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5.8. 유비의 죽음과 반군의 궤멸 ¶
6. 결과 ¶
7. 관련 인물 ¶
- 한경제
오초7국의 난을 제압하여 군현제를 확립시켰다. - 오왕 유비
제후왕들을 견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살해당한다. - 조조
어사대부가 되어 제후왕들을 견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원앙에게 참소 받아 사망한다. - 원앙
제후왕들의 봉지를 삭감할것을 주장하고, 조조를 참소해 죽게 만든다. - 주아부
창읍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어 반란군을 무너뜨린다. - 양왕 유무
오, 초나라 군대가 공격하자 주아부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지원이 오지 않자 힘껏 싸워 막아내었다. - 주구
유비에게 절부를 하나 빌려 하비성으로 가 하비성을 함락시키고 성양까지 진군하지만 사망한다. - 이광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공훈을 세웠으나 정작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 가의
한문제에게 제후왕들의 견제책을 올리고, 유무를 양왕으로 삼을것을 주청했다. - 전녹백
오나라 대장군으로 유비에게 별동대를 파견하라는 계책을 올리나, 거절당했다. - 관하(灌何)
관영의 아들. 반란 진압에 종군하였다. - 장맹(張孟)
관영의 시종이었던 인물. 관하를 따라서 출정하였으나, 오나라 군에게 죽고 만다. - 관부(灌夫)
장맹의 아들. 본래 장씨였으나 아버지와 관씨 집안의 인연때문에 성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죽자 군중에서 수십명의 장사들을 모집하여, 오군을 기습하였다. - 난포(欒布)
황제의 명으로 제나라를 평정했다. 이 공으로 유후(兪侯)에 봉해졌다. 조나라 평정에 어려움을 겪는 역기를 지원했다. - 역기
황제의 명으로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10개월이 넘도록 함락을 시키질 못했다. 난포의 도움으로 간신히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 [1] 오초7국은 오나라와 초나라 '등' 일곱 나라라는 뜻이지, 오·초 '외'에 일곱 나라가 더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오나라와 초나라가 이끈 7국의 난'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중앙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일곱 제후국 중 오·초의 힘이 가장 강성했기 때문에 이 둘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 [2] 현대 중국에서는 '오초'를 기재하지 않은 '칠국지난'이나 '칠왕지난'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자주 있다.
- [3] 윷놀이와 비슷한 중국의 전통 놀이로 윷놀이와는 다르게 6개의 막대기를 쓴다.
- [4] 삼국시대 촉한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도 아니고 좀 전에 언급된 오왕 유비(劉濞)도 아니다(...). 두 유비보다 이전 시대 사람이다. 유방의 장남이나 서자여서 후계에서 밀려났다.
- [5] 옛날에는 소금이 귀했기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 전매 사업으로 제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왕 유비는 화폐를 맘대로 만들 뿐만 아니라 소금도 맘대로 만들어서 부를 쌓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 이 경제력을 기반으로 군사를 양성하여 중앙에 반기를 들 수도 있으니 조조가 상소를 올린 것이다.
- [6] 웬만한 도망자들은 싸움 깨나 하는 이들일 텐데, 오왕이 그들을 끌어 모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것도 중앙에 위협적인 조치이다.
- [7] 다음 일곱 왕들은 역적이라 왕작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 [8] 훗날 후한(동한)을 세우는 광무제의 이름인 유수(劉秀)가 아니다. 발음이 똑같아서인지 리그베다 위키에 원래 조왕의 이름이 劉秀라고 잘못 기재돼 있었다(...).
- [9] 위에서 언급한 오나라 태자와는 한자 표기도 같지만 동일인 아니다. 전한 황실에 이 이름은 매우 흔하다.
- [10] 사후에 시호를 받아 제 효왕(齊孝王)이라고도 불린다.
- [11] 반란이 진압된 뒤 치천왕으로 임지가 바뀌며(뒤에 언급) 사후에 시호를 받아 치천 의왕(菑川懿王)으로도 불린다.
- [12] 《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 [13] 덕분에 유안은 오초7국의 난이 끝난 뒤 화를 면했다. 그러나 한무제 때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대하여 모반을 일으킨다는 혐의를 받아 자결하게 된다. 그래서 시호가 없다.
- [14] 내부분열도 원인이지만 결정적으로 힘이 중앙정부와 맞서기엔 너무 약했다는게 결정적이었다. 사실 이전에 한 조정은 제후국을 우대해주는 듯하면서 백성들을 관중지대로 이주시키는 등 중앙강화 지방약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 [15] 사후 시호를 받아 제북정왕(濟北貞王)이라고도 한다.
- [16] 사후 시호를 받아 교서우왕(膠西于王)이라고도 한다.
- [17] 성이 '주보'이고 이름이 '언'이다. 여기서 父는 아비 '부'가 아니고 미칭인 甫와 동일한 의미라 '보'로 읽는다.
- [18]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은혜를 넓히라는 명령이다. 그 전까지는 제후의 적장자 1명에게 봉지(封地)와 작위를 물려주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천자가 제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적장자 외 자제들에게 땅을 쪼개서 다시 각각 제후의 작위를 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제후국 하나하나의 크기가 극도로 작아져 강한 힘을 갖지 못하게 유도한 것이다. 이 조치는 앞서 설명했듯이 문제 때 가의가 주장한 것이지만 결국 2대 뒤인 무제 때 도입된 것이다.
- [19] 조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왕이 된 뒤 몇 년 안에 황제를 칭하게 되었다. 물론 조조는 사후에 황제로 추존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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